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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HELLO
댓글 0건 조회 25회 작성일 24-09-05 1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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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척자
이원호



"야, 분당룸싸롱 여기 어디야?"
자고 있는 줄만 알았던 뒷좌석의 사내가 불쑥 물었으므로 김명천은 백미러를 보았다. 사내의 충혈된 눈과 백미러에서 마주쳤고 김명천이 부드럽게 대답했다.
"예, 지금 대림동 사거리를 지났습니다."
"아닌데?"
눈을 치켜뜬 사내가 창밖을 둘러보더니 갑자기 김명천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쳤다.
"야, 차 세워."
"손님, 여기는."
"이새끼야, 세워."
사내가 이번에는 주먹으로 김명천의 어깨를 쳤다. 많아야 30대 초반쯤으로 김명천과는 너덧 살 연상 같았지만 처음부터 반말이었다. 김명천이 겨우 4차선의 길가에 차를 세웠을 때 사내가 서둘러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대림동의 8차선 도로였고 새벽 1시가 넘어있었지만, 인도에는 통행인이 많았다. 김명천이 밖으로 나왔을 때 사내는 길가의 건물담장에 대고 소변을 갈기는 중이었다. 행인들이 힐끗거리고 지났지만 행위를 막지는 않았다. 다행히 건물의 경비실도 안쪽이어서 눈치챌 것 같지는 않다. 심호흡을 한 김명천(金明天)은 차에 등을 붙이고 서서 사내의 방뇨가 끝나기를 기다렸다. 대리운전을 시작한 지 오늘로 꼭 두 달째가 되는 날이다. 며칠 전에는 지갑을 잃어버렸다고 난리를 친 손님을 겪었다. 그러다 그 주정뱅이의 코트 주머니에 든 지갑을 마누라가 찾아내고는 팁으로 만 원을 더 받았다. 방뇨가 끝난 사내가 비틀대면서 다가오더니 다시 뒷좌석에 올랐으므로 김명천은 차 문을 닫아준 다음 운전석에 올랐다.
"야, 너 몇 살이야?"
차가 출발했을 때 사내가 물었다. 조금 진정이 된 듯 목소리가 느긋해져 있었다.
"예, 스물여덞입니다. 사장님."
"너, 하루에 얼마 벌어?"
"대중없습니다."
"글쎄, 대충 얼마냐니까?"
"5만 원도 되고, 또."
"제일 많이 벌었을 때는 얼마야?"
백미러를 올려다 본 김명천은 대답하지 않았다. 20만 원이었다. 구미에 사는 사모님을 모셔다드렸을 때 팁으로 15만 원을 받았던 것이다. 사재가 백미러에서 김명천의 눈을 집요하게 찾아내더니 다시 물었다.
"글쎄, 최고로 얼마 벌었냐니까?"
"예, 20만 원이었습니다."
김명천이 정직하게 대답했다. 사내는 강남 최고급 룸싸롱 중의 하나인 화영에서 태웠다. 지금 김명천이 운전하고 있는 사내의 차는 벤츠였다. 이 나이에 이만한 재력을 갖추고 있다면 무언가 특별한 인간임에는 틀림없다. 설령 부모를 잘 만났다고 해도 그렇다. 그때 사내가 백미러를 향해 머리를 끄덕였다. 눈은 충혈되었지만, 술기운은 조금 가셔진 표정이었다.
"너, 체격도 괜찮은데, 성품도 좋아 보이고, 이 생활 얼마나 되었어?"
"두 달이 되었습니다. 사장님."
"너, 나한테 기분 상했지?"
"예?"
백미러를 올려다보았던 김명천은 긴장했다. 사내가 웃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놈은 주사가 있는 유형이다. 잘못 대답을 했다가는 싸움이 길어질 가능성이 많은 것이다. 김명천은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런 것 없습니다. 사장님."
"너, 학교는 어디 나왔어?"
화제가 돌려졌으므로 김명천은 마음을 놓았다. 이대로만 계속하면 된다.
"예, 전라북도에 있는 익산대학을 나왔습니다."
김명천은 그다음에 사내가 할 말을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사내는 예상과는 달리 그런 대학이 있느냐고 묻지 않았다.
"무슨 과 나왔어?"
"경영학과 졸업했습니다."
"언제 졸업했고?"
"2년 되었습니다."
사내의 집은 대림동의 고급 주택가였다. 차가 주택가로 꺾어졌을 때 주위는 조용해졌다. 가끔 승용차만 오갈 뿐이다.
"군대는 갔다 왔고?"
담배를 피워문 사내가 물었을 때 사내가 가르쳐준 공원이 보였다. 사내의 집은 공원 옆이라고 했던 것이다.
"예, 제대했습니다."
차의 속도를 줄이면서 김명천이 힐끗 백미러를 보았다. 손님을 태우면 하나같이 고향과 이력을 묻는다. 그리고는 끝이다. 대학 졸업 후에 서울로 올라와 이력서를 37곳에다 내고 28번은 필기시험에 합격했으며 최종 면접을 14번까지 보았지만 결국 공사장 잡일과 택배 보조, 이삿짐센터의 인부 노릇으로 전전하다가 대리운전사가 되었다. 그 사연을 다 말하자면 부산까지 내려가는 손님을 태워야 할 것이다.
"저기다. 저기 흰 이층집."
사내가 가리킨 곳으로 시선을 돌린 김명천은 흰색 이층 저택을 보았다. 담장이 높았고 철제 대문은 육중했다. 건물과 담장이 떨어져 있는 것을 보면 정원도 넓은 것 같았다. 서울의 부동산 가격에는 무지했지만 몇십 억대는 될 것이다. 정문 앞에 차를 세웠을 때 사내가 지갑에서 돈을 꺼내 내밀었다.
"25만 원이다. 5만 원은 대리운전 값이고, 20만 원은 팁이야."
놀란 김명천이 눈을 둥그렇게 떴을 때 사내가 다시 손바닥으로 어깨를 쳤다.
"난 네가 마음에 든다. 받아."
"고맙습니다. 사장님."
차에서 내린 사내가 다시 주머니를 뒤지더니 명함을 내밀었다.
"새 직장을 알아보고 싶다면 나한테 전화해라."
"감사합니다."
김명철이 이번에는 허리를 꺾고 절을 했다. 전에 사모님한테 15만 원 팁을 받았을 때는 이렇게 절을 하지 않았다. 당황한데다 수치심까지 섞여져서 얼떨결에 받았던 것이다. 차 소리를
들었는지 정문이 소리 없이 열리더니 흰 스웨터에 바지 차림의 여인이 밖으로 나왔다.
"많이 마셨어?"
맑은 목소리가 주위의 정적을 깨뜨렸다. 정문의 등에 비친 여인의 얼굴은 생기에 차 있었다. 아름답다.
"자, 그럼 연락해."
사내가 손을 들어 보였으므로 다시 허리를 굽혀 보인 김명천은 몸을 돌렸다.
"대리운전사야?"
여자의 목소리가 다시 또렷하게 뒤쪽에서 울렸다.
"이그, 술 냄새."
김명천은 어깨를 펴고 공원 옆길을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서울로 상경해 올 적에는 꿈이 있었다. 저만큼 좋은 저택은 당장에 어렵겠지만 안정된 직장을 갖고 아름답고 지적이며 선량한 여자의 남편이 되어서 저녁이면 가정으로 돌아가는 꿈이다. 그러나 지금은 악착같이 살기에만 바쁘다. 아직 월세방도 얻지 못해서 영등포 뒷골목의 하룻밤에 3,000원짜리 방에서 잔다. 작년에는 일이 끊겨 한 달 가깝게 노숙자 생활을 했으니 지금은 조금 나아졌기는 했다. 익산의 어머니께 이젠 7개월째 한 달에 60만 원씩을 보내고 있는 데다가 저축금이 215만 원이다. 김명천은 비교적 깨끗해진 밤공기를 가슴 가득하게 마셨다. 그러자 부자 동네의 공기는 비싼 것 같게도 느껴졌다.

고생은 해볼 만큼 해본 김명천이다. 초등학교 소사(掃舍)였던 아버지를 어렸을 때 잃은 후로 가난은 남은 세 식구를 마치 쇠줄처럼 엮어놓고 풀지 않았다. 아버지가 폐병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소사라는 직업은 학교의 잡일을 하는 인부이다. 청소는 물론이고 지붕 고치기, 거기에다 밤에는 학교 경비까지 맡아야 했다. 어머니는 두 남매를 우유배달과 행상, 파출부 등 닥치는 대로 일을 맡아 하면서 키웠는데 몸이 약해서 하루 쉬고 하루 일하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김명천은 중학 때부터 신문 배달을 했고 고등학교 때에는 방학 때마다 공사장을 찾아 집을 떠났다. 대학을 6년 만에 졸업한 것도 2년 동안 휴학을 하고 돈을 벌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동안 대한민국은 빠른 경제성장을 이루어 1인당 국민소득이 1만 불을 달성했다지만 김명천의 가족에게는 딴 세상의 이야기 같았다.
다음날 오후 6시 정각에 김명천은 대리운전 사업체인 신우통상의 사무실로 들어섰다. 15평쯤 되는 오피스텔 안에는 7, 8명의 기사가 와 있었다. 사장 서충만은 안쪽에서 전화를 받는 중이었다.
"아무래도 난 택시로 돌려야 할까 봐."
구석 자리에 앉은 김명천의 옆으로 안태식이 다가서서 말했다. 안태식은 40대 초반으로 전직 항공사 정비원이다. 명퇴 신청을 하고 퇴직금으로 사업을 시작했다가 1년 만에 망하고는 대리운전 기사가 된 것이다. 옆에 비집고 앉은 안태식이 길게 숨을 뱉았다.
"그게 더 안정적일 것 같단 말이야."
어젯밤 안태식은 손님과 싸우고는 도중에 다른 운전자와 교체되었다. 술 취한 손님이 뒷자리에서 발을 뻗어 안태식의 어깨를 찼다는 것이었다. 흔하게 있는 일이었지만 안태식은 참지 못했다. 손님은 사무실이 애써서 잡은 요정 국화의 단골이었다. 아마 사장 서충만이 그만두라고 했을지도 모른다.
"어, 김명천이, 이리 와 봐."
전화를 마친 서충만이 안에서 소리쳐 불렀으므로 김명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김명천이 다가가 섰을 때 서충만의 옆쪽책상에 앉은 임재희가 힐끗 시선을 주었다. 눈매가 날카롭고 살결이 희어서 신경질적으로 보이지만 임재희는 깔끔하게 업무를 처리했다. 대리기사들은 임재희를 서충만의 애인으로 믿고 있어서 함부로 대하지를 못한다.
"야, 너, 옷 그것밖에 없어?"
대뜸 서충만이 위아래로 훑어보며 물었다. 김명천의 눈 밑이 조금 붉어졌다. 가을이 지나 초겨울이 닥쳐온 11월 중순이었는데도 엷은 곤색의 점퍼 차림이었기 때문이다. 이 점퍼도 공사장에서 일할 적에 얻어 입은 것이다.
"무슨 일이신데요?"
대답 대신 김명천이 그렇게 묻자 이맛살을 찌푸린 서충만이 혀를 찼다. 그러나 두 달 동안 한 번도 지각이나 결근을 하지 않고 또한 궂은 일을 도맡아서 해온 김명철을 서충만은 신임하고 있었다.
"너, 일박 이일로 속초 다녀와. 수당은 기름값, 숙식비 빼고 35만 원으로 했어."
그렇다면 35에서 20만 원을 회사에 상납하고 15만 원이 남는다. 숙식비에서 절약한다면 그 이상이 될지도 모른다. 그때 서충만의 말이 이어졌다.
"일본 남자 하나하고 한국 여자가 손님이야. 그쪽에서는 운전에다 안내원 역할을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거다."
그리고는 서충만이 둥근 얼굴을 펴고 빙그레 웃었다.
"폼 잡으려는 거지. 차는 일제 렉서스다. 그 여자 차야."
서충만이 다시 옷을 훑어보았다. 김명천은 시선을 내렸다.

그날 밤 김명천은 세 탕을 뛰었는데 마지막 손님은 일산의 나이트클럽에서 분당까지 모시게 된 사모님 두 분이었다. 차종은 신형 그렌저. 두 분 사모님은 40대 중반으로 이미 취기가 올라 있었지만 점잖았다. 김명천의 나이나 신장에 대해서 관심을 보이지 않았고 말수도 적었다. 그런데 차가 외곽 순환도로로 접어들었을 때 문득 뒤쪽 오른편에 앉아 있던 여자가 입을 열었다.
"다 싫증 나, 이민이나 갈까 봐."
"나두 그래."
왼쪽 여자가 맞장구를 쳤다. 잠자코 앞쪽을 바라본 채 김명천은 긴장했다. 차 안은 조용했고, 밤공기가 차에 부딪히는 소음만 귀를 울렸다.
"숙희는 LA에다 백만 불이 넘는 집을 얻었다던데, 집안에 풀장도 있다더라."
오른쪽이 낮게 말을 이었다.
"백만 불이면 12억이야. 내 아파트 한 채만 팔아도 된다구."
"미국에선 백만 불이 큰돈이지. 흥."
왼쪽의 갸름한 얼굴이 코웃음을 쳤다.
"강남에선 45평짜리 아파트 한 채 값이야. 숙희가 한국에 오면 그것 팔아서 30평짜리나 겨우 얻을걸?"
"하긴 은행 융자를 끼고 샀을 테니까."
여자들의 대화에 활기가 띄워졌지만 김명천의 어깨는 늘어졌다. 자신과는 다른 세상의 대화인 것이다. 그때 갸름한 얼굴이 김명천에게 물었다.
"아저씨는 이민 가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는 덧붙였다.
"이렇게 대리운전이나 할 바에는."
백미러를 올려다본 김명천은 여자가 아차하는 표정을 짓는 것을 보았다. 김명천이 백미러를 향해 웃어 보였다.
"요즘은 돈이 있어야 이민도 가는 것 아닙니까? 저는 비행기 요금도 없습니다."
"돈이 있다면 가겠어요?"
이번에는 오른쪽 여자가 묻자 김명천은 머리를 저었다.
"안 갑니다. 사모님."
"왜요?"
"그냥 한국에서 살겠습니다."
"외국 나가 보셨어요?"
목소리만 들어도 여자의 표정은 알 수 있었으므로 김명천은 머리를 조금 숙였다. 백미러에 자신의 굳어진 얼굴을 비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그러나 대답 안 할 수는 없다.
"가보지 못했습니다. 사모님."
"나가보면 생각이 달라질 거예요."
"그렇습니까?"
"이 좁은 땅에서 아웅다웅하면서 살았던 것이 우습게 보일 거라구요."
"아아, 예."
김명천의 반응이 신통치 않았는지 여자들은 더이상 말을 걸지 않았다. 어머니는 지금도 파출부를 나가고 있다. 앞쪽을 응시한 채 김명천은 어머니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머니의 꿈은 소박했다. 그저 세 식구가 한집에서 의식주 걱정 없이 사는 것이었다. 그래서 행상을 하여 모은 돈으로 내 첫 등록금을 내주었다. 그야말로 피나는 돈이었다. 외국에 나가 살다니, 어머니는 펄쩍 뛸 것이었다. 돈을 아무리 벌어도 그렇다. 김명천은 문득 어머니가 지금까지 한 번도 세상살이에 불평을 한 적이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오히려 감사하고 기쁜 표정의 어머니 모습이 많았다. 중학교 때 신문 배달을 해서 받은 월급을 어머니한테 줄 때가 그랬다. 고등학교 때 전교에서 3등을 했을 때도 그렇다. 훈련이 센 해병대에 지원해서 첫 휴가를 나왔을 때도, 심호흡을 한 김명천은 깊은 어둠에 묻힌 앞쪽을 노려보았다. 어머니는 낙망하지 않았다. 우리는 가난했지만 서로 의지하고 믿었으며 감사했다. 나는 한국에서 그렇게 살 것이다.

다음날 오전 9시 5분 전에 김명천은 방배동의 단층 주택 앞에 섰다. 미리 전화로 연락을 한 터라 벨을 눌렀을 때 철제 대문에서 자물쇠 풀리는 소리가 울렸다. 대문 안으로 들어선 김명천은 현관 앞에 세워진 은색 승용차를 보았다.
"어서 오세요."
현관문이 열리더니 외출복 차림의 30대 여인이 나왔다. 늘씬한 몸매가 더욱 두드러지도록 몸에 붙은 셔츠와 바지 차림이었고 운동화를 신었다. 여자 뒤로 40대쯤의 사내가 보였는데 작은 키에 왜소한 체격이었다.
"제가 김명천입니다."
김명천이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하자 여자는 부드럽게 웃었다.
"잘 부탁해요. 제가 운전이 서툰데다 몸도 좋지 않아서요."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남자는 김명천에게 눈인사만 했을 뿐 잠자코 차에 올랐다. 남자는 일본인이다. 사장 서충만의 설명에 의하면 여자는 일본인의 현지처이고 일 년의 반은 제주도에서 산다. 그동안 여자가 여러 번 대리운전을 이용했지만 서충만이 모두 직접 나섰기 때문에 씀씀이에 대한 소문은 들리지 않았다. 뒷좌석에 둘을 태우고 거리로 나섰을 때 여자가 말했다.
"말씀 들으셨겠지만 호텔 예약은 설악산 호텔에 해놓았으니까 동해안 관광부터 하기로 해요. 내일은 설악산을 볼 테니까."
"알겠습니다. 사모님."
쉬라고 말할 때까지 아뭇소리 말고 달리기만 하라는 뜻이었다. 이런 분위기가 오히려 편했으므로 김명철은 조심스럽게 차를 몰았다. 아직 1만㎞도 주행하지 않은 새 차여서 차 안에는 가죽 냄새가 배어져 있었다. 차가 고속도로 진입로에 들어섰을 때 여자가 남자에게 말했다.
"그래도 한국 사람은 겉과 속이 다르지는 않아요. 여보."
유창한 일본말이다. 사내는 가만있었지만, 여자의 말이 이어졌다.
"당신과는 언제 어떻게 헤어질지 모르지만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여자가 힐끗 백미러를 보는 눈치였으므로 김명천은 시선을 들지 않았다.
"난 당신을 배신하지는 않는다는 거죠."
"당신이 신뢰를 보인다면 배신하지 않겠어요."
"알고 있어."
사내가 말하더니 짧게 웃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난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누구를 배신한 적 없어."
서로 배신하지 않겠다고 장담하는 것을 보면 관계에 문제가 발생한 것 같았다. 그때 여자가 머리를 들더니 김명천에게 물었다. 물론 한국어였다.
"아저씨, 일본어 해요?"
"못합니다."
금방 대답한 김명천이 백미러로 여자를 보았다. 그러나 일본어는 대학 때 마스터했다.
"죄송합니다. 사모님."
"아니, 천만에요."
부드럽게 말한 여자가 다시 사내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난 내 인생을 모두 당신에게 맡겼어요. 여보."
여자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호소력이 있었다. 그래서 김명천은 하마터면 백미러로 뒤쪽을 볼뻔했다. 여자의 유창한 일본어가 이어졌다.
"하지만 당신에게 부담은 주기 싫어요. 이렇게 한 달에 한 번씩 만나기만 해도 난 행복해요."
그 말을 들은 김명천의 가슴도 메어졌다.

강릉 경포대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12시 반이었다. 관광호텔 앞에 차를 주차 시켜놓고 둘이 호텔 식당으로 점심을 먹으러 들어가면서 김명천은 점심값으로 2만 원을 받았다. 물론 돈은 여자가 준 것이다. 거기에다 3시까지 자유시간을 얻었으므로 김명천은 햄버거와 콜라로 점심을 때웠다. 점심값으로 6,000원을 썼으니 1만 4,000원이 수입으로 남았다. 맛있는 요리보다 영양가 우선으로 식사를 해결하는 것은 김명천의 습관이다. 가난과 절약이 몸에 배어 있었지만 김명천은 결코 그것이 부끄럽지 않았다. 그렇다고 영양가 없는 음식에 턱도 없이 비싼 돈을 내고 사 먹는 사람들을 질시하거나 비난하지도 않았다. 적응해가는 것이다. 전에는 햄버거도 사 먹지 못했다. 지금은 햄버거로 때울 수준이지만 나중에 수십만 원짜리 풀 코스 요리를 시켜 먹을 기회가 온다면 거침없이 먹을 것이다.
바다가 보이는 공중 전화박스는 비어 있었다. 요즘은 휴대전화가 보급되어서 초등학생도 소지하고 다니지만 어머니와 동생 정은은 아직 없다. 김명천이 집에 전화를 했을 때 불안했던 예감이 맞아떨어졌다. 어머니가 전화를 받았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집에서 전화를 받았다는 것은 몸이 아파서 일을 나가지 못했거나 일이 없을 때뿐이다. 그 경우에 어머니는 언제나 기운 없이 전화를 받는다.
"어머니, 나, 어머니 아들."
김명천이 소리치듯 말했다. 그러면 어머니는 기운을 차리고는 목소리에 생기가 띄워지곤 했다.
"응, 명천아."
"나, 지금 강릉에 왔어. 회사 일로."
"점심은 먹었어?"
"응, 생선회를 실컷 먹었어."
"잘했다."
어머니가 기침을 두어 번 하더니 곧 목소리가 더 밝아졌다.
"난 괜찮다. 오늘은 네가 보내준 돈으로 김장을 하려고 집에 있어."
"김장값은 따로 보내준다니까."
"두 식구가 먹을 건데 몇 포기면 돼."
"주인집에서는 뭐라고 안 해?"
"아직 그런 말 없으니까 걱정 안 해도 된다."
어머니가 자르듯 말했으므로 김명천은 심호흡을 했다. 방 한 칸에 부엌과 화장실이 딸린 독채 전세금이 1,000만 원이었으니 지방이라고 해서 싼 편이기는 했다. 그래서 지난달부터 집주인이 전세금을 500만 원 더 올리든지 집을 비우든지 하라고 독촉하는 중인 것이다. 이것도 정은이를 통해서 겨우 들은 말이다. 어머니는 김명천에게 한 번도 내색조차 하지 않았는데 전해 준 정은이를 몇날 며칠을 두고 혼냈다는 것이다.
"어머니, 두 달만 기다리면 내가 5백 만들어 보낼게. 그때는 보너스에다 수당이 함께 나올 테니까."
김명천이 호기 있게 말하자 어머니의 목소리도 높아졌다.
"우리가 다른 곳으로 이사 가면 돼. 시골에는 싼 집이 많아."
"그래도 정은이 학교 다니고 어머니 일 나가는데."
했다가 김명천은 말을 그쳤다. 김명천은 어머니에게 운송회사에 다닌다고 했지만 회사 전화번호는 알려주지 않았다. 1년 전에 공사장에 나가면서 무역회사에 취직했다고 거짓말을 한 것이 탄로가 난후에 어머니는 며칠간 식사도 하지 않았다. 다시 어머니가 기침을 했으므로 김명천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어머니."
하고 불렀지만 어머니는 대답하지 않았고 기침 소리도 끊겼다. 송화구를 막고 있는 것이다.

속초까지 오는 동안 해수욕장 두 군데를 더 들러서 바닷가 경치를 감상했기 때문에 설악산 호텔에는 오후 7시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우린 호텔에서 쉴 테니까."
차가 멈췄을 때 여자가 지갑을 열면서 말했다.
"미스터 김은 저녁 먹고 숙소 정해서 쉬고 내일 아침 9시까지 오세요."
여자가 10만 원권 수표 한 장을 내밀었다.
"감사합니다. 사모님."
"무슨 일 있으면 핸드폰으로 연락하겠어요."
"예, 사모님."
차에서 내린 여자와 일본인이 호텔 안으로 들어서자 김명천은 차를 안쪽 주차장에 우선 주차 시켰다. 내일 아침 9시면 앞으로 시간이 14시간이나 여유가 있는 것이다. 가끔 원정 운전을 가는 최씨나 박씨한테 이런 경우가 닥쳤다면 차를 놀리지 않았을 것이다. 서울까지 충분히 두 탕은 뛸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러나 김명천은 의자를 뒤로 눕힌 다음 길게 누웠다. 숙박비와 식비로 10만 원을 받았으니 저녁과 아침 두 끼 식사비로 2만 원을 쓰고 잠은 차에서 자려는 것이다. 그러면 8만 원이 남는다. 어느 곳이건 어떤 자세거나 상관없이 자려고 마음먹으면 김명천은 1분 안에 잠이 들 수 있었다. 노숙을 할 적에도 대부분 원인이 자신이라고 할지라도 그렇다. 중학 때부터 새벽에 일어나 신문 배달을 하면서도 김명천은 불평하지 않았다. 가족은 물론이고 사회에 대한 불만도 품지 않았다.
중학 때부터 김명천이 스스로 지어낸 말이 있다. 내일이 있다면 희망도 있다는 말이었다. 분당룸싸롱 중학교 때의 목표는 졸업 때까지 태권도 초단을 따는 것이었고 그것이 일찍 달성되자 다음에는 어머니의 겨울 코트로 바꾸었다. 백화점에서 토끼털 코트가 55만 원으로 걸려져 있었는데 그것을 목표로 삼은 것이다. 그러나 55만 원을 모아 백화점에 갔을 때 그 코트는 없어진 대신 80만 원 이상의 털코트만 걸려져 있어서 결국 사드리지는 못했다. 물론 나이가 들수록 목표는
달라졌으며 더욱 현실적이 되어갔다. 김명천의 목표는 대통령이 되겠다던가 또는 의사, 판사 등 먼 앞쪽에 있는 것이 아니었다. 가난한 환경의 영향도 있었겠지만 가장 현실적이며 가장 가까운 미래에 대한 목표가 항상 김명천의 머릿속에 심어져 있다. 지금 당장의 목표는 어머니의 전세금 인상분을 한 달 안에 보내드리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전공에 맞는 직장을 얻는 일이다. 김명천은 눈을 감고는 심호흡을 했다. 내일이 있다면 희망도 어느 구석에겐 있을 것이었다. 휴대전화가 울렸을 때는 밤 9시가 조금 넘었을 무렵이었다. 깜박 잠이 들었던 김명천은 서둘러 전화기를 귀에 붙였다.
"예, 김명천입니다."
"김명천씨, 나."
임재희의 목소리였다. 대리운전 사무실은 지금 바쁘기 시작하는 시간이다.
"어, 임선생. 왠 일이야?"
김명천도 다른 기사들처럼 임재희를 임선생으로 부른다. 그러나 두 달 동안 임재희 하고는 한번도 둘이 얼굴을 맞대고 이야기한 적도 없다. 김명천이 웃음 띤 목소리로 말했다.
"나, 원정 왔는데, 혹시 착각한 거 아냐?"
"착각한 것 아냐."
임재희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보통 대리운전 연락은 임재희가 해주는데 말투가 냉담해서 기사들의 평이 좋지 않았다. 김명천에게도 입사한 지 사흘째인가 되던 날부터 반말을 썼고 그것도 아주 자연스러웠다. 의자를 세우고 앉은 김명천이 네온사인이 번적이는 호텔 나이트클럽에 시선을 주며 물었다.
"그럼 몇 시에 도착해?"
"그건 알 수 없어."
"도착하면 전화해. 내 핸폰으로."
"왜? 일 있어?"
했다가 일이 있다면 핸폰으로 연락하라고 할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임재희의 휴대전화 번호도 모른다.
"없어. 내 전화번호 적어."
그리고는 임재희가 번호를 불러주더니 제가 먼저 전화를 끊었다. 잠이 달아난 김명천은 눈만 껌벅이며 나이트클럽 입구를 보았다. 서울 번호판을 붙인 고급 승용차가 입구에서 멈춰 서면 종업원들이 서둘러 달려가 손님을 맞고 있었다. 특급 호텔의 클럽이어서 손님들의 수준도 높아 보였고 벌써 클럽 주차장에는 차들이 다 찼다. 경제 불황으로 대학 졸업생 취업률이 갈수록 낮아지고 청년 실업률도 높아지는 상황이었으나 이곳은 예외였다. 클럽에서 여자를 끼고 양주 서너 병을 마시고 나면 김명천의 한 달 수입보다 계산이 많이 나올 것이다. 그때 외제 2인승 스포츠카가 다가오더니 클럽 현관 앞에서 멈춰 섰다. 그러자 종업원이 달려갔고 차 안에서 한 쌍의 남녀가 내렸다. 운전석에서 내린 사내는 20대 초반의 앳된 얼굴이었다. 김명천과의 거리는 20m쯤인데다가 불빛이 환했으므로 사내가 찬 귀고리까지 다 보였다. 종업원에게 차를 맡긴 사내는 늘씬한 몸매의 아가씨와 함께 거침없이 클럽 안으로 들어갔다. 그들의 뒷모습을 보던 김명천은 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능력에 따라 빈부의 구분이 이루어진다.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자신의 능력으로 모은 부를 얼마든지 뜻대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을 무조건 비난하는 자들이 오히려 사회에서 배척되어야 한다. 그러나, 심호흡을 한 김명천은 갑자기 배가 고파졌다.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것이 문제인 것이다. 열심히 능력을 발휘하여 부를 축적한 사람들까지 한꺼번에 매도당하는 것은 그런 인간들 때문이다. 김명천은 얼굴을 떠올렸다. 연예인도 아니었고 요즘 갑자기 기업가로 출세한 인물도 아니었다. 부모를 잘 만난 청년일 뿐이었다. 호텔 아래쪽의 식당으로 걸어 내려가면서 김명천은 그 청년의 부모가 정직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인물인가 궁금해졌다.
다음 날 아침, 김명천에게 장씨라고 성씨만 알려준 여자는 10시 반이 되어서야 일본인과 함께 밖으로 나왔다. 둘 다 피로한 얼굴이었고 차에 오르자마자 일본인은 몸을 눕히더니 눈을 감았다.
"아침에 설악산을 오르려고 했지만 어젯밤 과음을 해서."
장여사가 혼잣소리처럼 말하더니 백미러로 김명천을 보았다.
"동해안 따라서 내려가다가 경부 고속도로를 타고 올라갈 수 있죠?"
"예, 사모님."
김명천이 기운차게 대답했다. 어차피 오늘까지 고용되었으니 밤에 돌아가도 상관없는 것이다. 같이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수입이 늘어난다. 차가 속력을 내었을 때 장여사가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힘들어요. 이 생활도."
김명천이 백미러를 보았을 때 여자의 시선은 비껴나 있었다.

장여사는 말을 아꼈다. 동해안을 따라 내려가는 동안 일본인은 줄곧 잠만 잤어도 장여사는 창밖을 본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러나 영덕 근처의 휴게소에서 일본인이 깨어나 화장실에 갔을 때 장여사가 입을 열었다.
"저놈은 서울에 살림 차려준 애인이 또 하나 있어요."
놀란 김명천이 시선을 들자 장여사가 백미러를 향해 웃어 보였다. 흰 이가 드러나면서 장여사 의 얼굴이 천진스럽게 변해졌다.
"내가 세컨이라면 그 여자는 서드인 셈이지. 하지만."
장여사의 얼굴이 다시 원상으로 돌아갔다. 그러자 금방 수심이 잠긴 듯한 표정이 되었다.
"나두 애인이 있죠. 그래서 우린 서로 비긴 셈인데."
김명천은 잠자코 앞쪽만 보았다.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사는 사람들이지만 이해 못 할 것도 없다. 어쨌든 이 여자는 나에게 생활비와 나아가 어머니의 전세금 인상분을 보태는 데 일조를 하고 있다. 2년 동안 온갖 일을 해오면서 김명천은 살아가는 요령을 스스로 익혀왔다. 자신과 상관없는 불의에 분개하고 날뛰다가는 굶기 십상이라는 것이다. 그렇게 살았다면 진즉 지쳐 떨어졌을 것이다. 힐끗 창밖에 시선을 주었던 장여사가 말을 이었다.
"문제는 저놈이 눈치를 챈 것 같아. 나한테 애인이 있다는걸 말이야."
"그렇습니까?"
겨우 김명천이 그렇게 대답해 주었을 때 장여사가 가늘게 숨을 뱉았다.
"사람을 시켜서 내 뒷조사를 한 모양이야. 어젯밤에 은근히 그 이야기를 하길래 술만 딥다 마셨어."
장여사는 이제 자연스럽게 반말을 썼다.
"이번 여행은 저놈이 그 이야기를 꺼내려고 가자고 한 것 같아."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그런 일 없다고, 오해라고 딱 잡아떼었지만, 증거를 갖고 있는 모양이야."
"큰일인데요."
"집하고 차는 모두 내 명의로 되어 있으니까 그건 되었지만."
장여사가 굳어진 얼굴로 백미러를 보았다.
"헤어진다면 매달 받던 생활비가 끊길 테니 그게 걱정이야."
"애인을 정리하시면 안 됩니까?"
"알고 있다면 이미 늦었어."
"위자료는 받을 수 없을까요?"
"미스터김은 순진해."
희미하게 웃은 장여사가 다시 가늘게 숨을 뱉았다.
"그런 것 없어. 집을 내 것으로 해놓은 것만 해도 다행이야."
그때 일본인이 다가왔으므로 둘은 이야기를 멈췄다. 김명천이 서둘러 밖으로 나와 문을 열어주었을 때 일본인이 빙긋 웃었다.
"아리가도."
김명천이 차를 출발시켰을 때 이제 잠에서 깨어난 일본인이 맑고 또렷한 목소리로 장여사에게 말했다. 물론 일본말이다.
"바닷가 공기가 맑군."
"그래요. 여보."
장여사가 일본인의 옆으로 바짝 붙어 앉는 것이 백미러를 보지 않아도 느껴졌다.
"오해는 풀어 버리세요. 여보."
"그러지."
시원스럽게 말한 일본인이 창문을 열었는지 찬 공기가 몰려 들어오면서 소음이 심해졌다. 일본인이 말을 이었다.
"욕심을 조금 줄이기만 하면 그만큼 행복이 늘어나는 법이지. 내가 욕심을 줄이기로 하지."
그때서야 김명천은 백미러로 일본인을 보았다. 오늘도 손님한테서 한 수 배웠다.

김명천이 장여사의 집에서 나왔을 때는 저녁 8시 반이었다. 일본인과 일이 잘 풀렸기 때문인지 장여사는 수당에다 5만 원을 더 얹어 40만 원을 주었으므로 20만 원이 몫으로 남았다. 거기에다 숙박비와 식대에서 절약한 돈이 10만 원이었으니 일박이일의 대리운전에서 30만 원을 번 셈이었다. 길가에선 김명천이 전화를 걸었을 때 임재희는 벨이 세 번 울리고 나서 응답했다.
"나 도착했어."
"거기 어디니?"
임재희가 제 친구한테 하는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며 물었다.
"방배동이다. 왜?"
쓴웃음을 지은 김명천이 대답하자 임재희는 흥흥 웃었다. 지금까지 김명천은 한 번도 임재희가 웃는 모습을 못 보았다. 사무실인지 송화구에서 떠들썩한 사내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얘, 내가 12시쯤 전화할게."
그리고는 임재희가 전화를 끊었으므로 김명천은 다시 쓴웃음을 지었다. 바로 앞쪽에는 사장 서충만이 앉아 있을 것이었고 주위의 사내들도 귀를 세운 상황일 테니 임재희는 모험을 한 것이다. 영등포의 합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10시가 넘어있었지만 같은 방을 쓰는 오씨는 오늘도 들어오지 않을 모양이었다. 하루 3천 원씩 계산을 하다가 한 달치를 선불하면 그중 큰 한 평짜리 방이 두 사람에게 배분되었는데, 물론 화장실은 없다. 세면과 화장실은 현관 앞에 있어서 공동으로 사용해야 한다. 김명천은 한 달분씩 선불을 주었으므로 한 평짜리를 썼고 화장실도 가까웠다. 그러나 같이 방을 쓰던 오씨가 나흘 전부터 들어오지 않았다. 지금까지 선불을 하다가 일주일째 미루더니 결국 도망친 것 같았다. 사람을 많이 겪은 주인도 그렇게 알고 다른 합방자를 찾는 눈치였다. 저고리만 벗은 채로 방바닥에 누워 잠이 들었던 김명천은 핸드폰의 벨소리에 눈을 떴다. 방의 불을 꺼놓아서 핸드폰의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핸드폰을 귀에 붙였을 때 예상했던 대로 임재희의 목소리가 울렸다.
"할 이야기가 있으니까 5시에 여의도 고수부지로 나와."
대뜸 임재희가 말했으므로 김명천은 이맛살을 찌푸렸다. 5시면 임재희가 퇴근하는 시간이다. 애인 사이라면 새벽이건 한낮이건 가릴 것 없지만 임재희 하고는 서로 눈길 한번 제대로 마주치지 않았다. 김명천이 임재희를 이성으로 의식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야?"
김명천의 목소리가 삭막하게 들렸던 것 같다. 잠시 말을 멈췄던 임재희의 목소리가 낮고 약해졌다.
"그냥, 할 이야기가 있어."
더 이상 묻기도 거북했으므로 김명천은 승낙하고 전화를 끊었다. 서울에 온 지 2년이 되었지만 여자하고 데이트는 한 번도 하지 못한 김명천이다. 물론 기회는 여러 번 스치고 지나갔다. 상가 공사장에서 5개월 동안 잡부로 일을 할 때 단골식당 집 주인의 여동생이 호의를 보였었고, 놀이공원 야간경비를 했을 때는 매표구에서 근무하던 미스민의 노골적인 구애를 받았다. 그러나 김명천은 아직 연애는 사치라고 생각했다. 외롭다면서 여자를 만난다는 것은 김명천에게 성욕을 참지 못해서 홍등가를 찾는 것과 같다고 느껴졌다. 그리고 긴장을 풀어서 득 될 것도 없는 것이다. 아직 확실한 미래도 보이지 않는 처지에 여자를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할 것인가? 잡지도 못한 목표를 이야기한다고 해도 거짓말만 붙여지게 될 것이었다. 김명천은 다시 몸을 눕히고는 잠에 빠져들었다.

오전 5시면 아직 아둡다. 초겨울의 강바람도 센데다 갑자기 추워진 날씨여서 김명천은 점퍼에 두 손을 찌르고 고수부지 입구로 들어섰다. 주차장에 딱 한 대의 승용차가 들어섰다. 주차장에 딱 한 대의 승용차가 세워져 있었다. 임재희의 흰색 소형차였다. 버스 노선을 모르는 데다 아직 이른 시간이어서 버스도 뜸했으므로 김명천은 택시를 타고 왔다. 쪼들리며 살다 보면 난데없이 지출되는 택시비도 아까운 법이다. 지금처럼 뚜렷한 목적 없이 나선 경우는 더 그렇다. 김명천이 다가갔을 때 소형차의 전조등이 뻔쩍 켜졌다가 꺼졌다. 그러더니 창문이 열리고는 임재희의 얼굴이 드러났다.
"추워, 들어와."
저것이 밖에서도 반말을 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불쑥 들었지만 김명천은 잠자코 옆좌석에 올랐다. 차 안은 따뜻했다. 싸구려 방향제 냄새도 부드러웠다. 임재희는 힐끗 시선을 주었다가 다시 앞쪽으로 얼굴을 돌렸지만 사무실에서 보던 것처럼 시선이 맵고 건조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역시 앞쪽을 향한 채 김명천이 어색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이제는 옆에 앉은 임재희한테서 옅게 화장품 냄새가 맡아졌다. 임재희의 이런 냄새는 처음 맡는다.
"오늘 밤에 사장이 보증금을 내라고 할 거야."
대뜸 임재희가 말하더니 머리를 돌려 김명천을 보았다. 차 안은 어두웠지만 바로 한 뼘쯤 앞에 떠 있는 임재희의 얼굴 윤곽은 선명하게 드러났다. 굳어진 표정이다. 김명천의 시선을 받은 채 임재희가 말을 이었다.
"내지 마."
"왜?"
"사장이 떼어먹고 도망갈 거야."
"왜?"
"왜는 또 왜?"
목소리를 높인 임재희가 눈썹을 세우고 김명천을 보았다.
"장사가 안되니까 그렇지."
"그렇다고 보증금을."
"아이구."
입맛을 다신 임재희가 답답하다는 듯이 길게 숨까지 뱉았다.
"죽겠네, 증말."
"넌 그걸 어떻게 알아?"
"내가 사장 애인이라 안다. 왜?"
그랬다가 임재희가 다시 숨을 뱉더니 목소리를 낮췄다.
"사장은 내 외삼촌이야. 그래서 알아."
"그런데."
"그런데 왜 외삼촌을 배신 하느냐구? 그리고 왜 너한테 이런 말을 해주느냐구?"
"아니, 너라니, 이게 정말."
"병신."
"어라?"
했지만 김명천의 목소리는 낮아졌고 곧 시선도 돌려졌다. 그러나 임재희는 아직도 김명천을 노려보고 있다. 그랬다. 열흘쯤 전에 박 아무개라는 대리운전사가 손님 지갑을 훔쳐 도망간 사건이 있었고 사장은 결국 150만 원인가를 내놓고 합의해야만 했다. 또 그전에는 운행 중에 사고가 나서 차 수리비로 사장이 200 가깝게 들었다. 운전사가 도망갔기 때문이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 보증금을 받아야겠다고 사장은 여러 번 운을 떼었던 것이다. 다시 차 안에 어색한 정적이 덮여졌다가 결국 김명천이 먼저 입을 열었다.
"그럴 리가 있나? 그렇게 하면 사기를 치는 것인데."
"벌써 여러 번 쳤어."
임재희가 김명천의 말을 자르더니 전조등을 켰다. 그러자 앞쪽의 강물이 드러났다.
"우리 밥 먹으러 가자. 배고파."
그 순간 소형차가 불끈 움직였다.

"난 오늘부터 회사 안 나갈 거야."
강변도로에 나왔을 때 임재희가 앞쪽을 본채 말했다. 차량 통행이 드물었으므로 임재희는 차에 속력을 냈다.
"내가 보증금을 받았다가는 나도 공범이 될 테니까."
"정말 사장이 외삼촌이야?"
"그래, 바보야."
힐끗 눈을 흘긴 임재희가 차를 영등포 방향으로 회전시켰다.
"하지만 난 외삼촌 집도 몰라. 누구하고 사는지도 모르고."
"그런데 왜 회사에서 일한 거야?"
"놀고 있었는데 할 수 있어? 월급도 넉 달 동안 괜찮게 받았는데."
"사장이, 아니, 외삼촌이 정말 보증금 걷어서 도망친다고 그래?"
"그렇다니까?"
다시 목소리를 높였던 임재희가 곧 어깨를 늘어뜨렸다.
"나한테도 일 인분 준다고 했어. 200만 원."
일 인당 보증금으로 걷겠다는 금액이 200만 원이었다. 그렇다면 대리운전사가 대충 30명 정도였으니 다 걷는다면 6,000만 원이다. 그때 김명천의 마음을 읽었는지 임재희가 말을 이었다.
"사무실 보증금도 월세로 다 공제해서 이번 달부터는 보증금을 넣어야 돼. 그러니까 돈 걷어서 도망치기만 하면 뒤에는 아무것도 남는 게 없어."
김명천은 입을 다물었다. 이제 남은 의문은 왜 자신한테 이 비밀을 털어놓느냐는 것뿐이었지만 그것까지 물을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임재희는 대방동의 골목길을 익숙하게 헤집고 들어가더니 곧 허름한 간판을 붙인 순대국집 앞에다 차를 세웠다.
"이 집 맛있어. 값도 싸고."
차에서 내리면서 임재희가 그랬다. 두 평쯤 되어 보이는 식당 안에는 손님들이 차 있었지만 구석 쪽에 금방 끝난 자리가 두 개 비어 있었다. 그들은 그릇도 치우지 않은 그 자리에 앉았다.
"어제 원정 뛰었잖아?"
식탁에 팔꿈치를 짚고 손등 위에 턱을 받친 임재희가 정색하고 김명천을 보았다. 조금 치켜뜬 검은 눈동자가 흐린 전등빛을 받아 반짝였다.
"회사에다 입금 시키지 말고 그냥 먹어. 오늘 밤부터 출근하지 말란 말야."
김명천이 입을 벌렸을 때 임재희가 머리를 돌리더니 주방에다 소리쳤다.
"여기 순대국 둘요."
그러더니 다시 입을 닫은 김명천에게로 머리를 돌렸다.
"어차피 이삼일 후면 문 닫고 도망칠 텐데 너 찾을 여유가 어디 있어?"
"또 너라니?"
김명천이 눈을 부릅떴다가 임재희의 시선과 부딪치고는 곧 깜박였다. 임재희가 피식 웃었다.
"넌 참 순진해. 조금 바보 같긴 하지만."
"너, 까불래?"
"두 달 동안 한 번도 입금액 속이지도 않고 장난치지 않았어. 그런 인간은 너 하나뿐이야."
"너, 몇 살이야?"
"스물셋이다. 왜?"
"내 동생 나이인 것이."
"나이만 많다고 오빠냐?"
순대국이 놓여졌는데 과연 고기도 많은데다 찬도 어울렸다. 밥에는 찬이 맞아야 하는 법이다. 순대국에는 김치, 깍두기, 거기에다 매운 풋고추에 찍어 먹는 된장이 맞는다. 돼지고기에는 새우젓이 맞고 물만 밥에는 장아찌 종류가 입맛을 돋운다는 것쯤은 김명천도 안다. 임재희가 자기 국그릇에서 고기를 뜨더니 김명천의 그릇에다 가득 덜어 주었다.
"많이 먹어. 오늘은 내가 살게."

식당에서 나온 김명천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침 7시가 되어가고 있었지만 잿빛 하늘은 저녁 무렵처럼 느껴졌다. 바람결에 습기가 묻어 있는 것이 곧 눈이 내릴 것 같았다.
"집이 어디야? 데려다줄게."
계산을 하고 나온 임재희가 물었지만 김명천은 머리를 저었다.
"여기서 가까워. 버스 타고 가면 돼."
"그러니까 데려다준다니깐."
"괜찮아. 다른데 들렸다 가려고."
합숙소는 가까웠고 가기도 쉬웠지만 임재희에게 보이기가 싫었기 때문이다.
"좋아. 그럼 안녕."
임재희가 손을 내밀었다.
"내가 핸폰으로 연락할께."
"오늘 잘 먹었어."
그러자 임재희가 김명천의 손을 꽉 쥐었다가 놓았다.
"다른 직장 알아봐. 조금 착실한 회사로."
"고마워."
소형차에 오른 임재희는 요란한 엔진음을 내더니 골목을 빠져나갔는데 뒤쪽 배기관에서 매연이 꽤 많이 나왔다. 김명천은 아직도 행인이 드문 거리를 천천히 걸었다. 배가 든든했으므로 날씨가 조금 싸늘했어도 견딜만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회사에서 할 일을 생각하는 생활이 된다면 어떤 일이라도 할 것이다. 김명천은 쓴웃음을 지었다. 수도 없이 꿈꿔온 일상이다. 언젠가는 기회가 오리라고 믿으면서 살아온 것이 벌써 2년이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다시 직장을 옮겨야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자 김명천의 어깨는 늘어졌다. 그날 저녁 6시가 되었을 때 김명천은 회사에 출근했다. 사장 서충만은 자리에 앉아 있었지만 언제나 제일 먼저 출근했던 임재희의 자리가 비어져 있었으므로 김명천은 가늘게 숨을 뱉았다.
"어, 왔어."
머리를 든 서충만이 김명천을 보더니 씩 웃었다.
"너, 잘했다고 칭찬받았다. 앞으로 그 집 원정 때는 네가 전속으로 해라."
그리고는 손을 내밀었다.
"임재희는 아파서 결근이야. 수당 받은 건 나한테 내라."
김명천이 돈을 내놓자 서충만은 세어보지도 않고 주머니에 넣더니 생각난 듯 말했다.
"그리고 보증금 200을 내야겠다. 오늘 중으로 입금시키든지 직접 가져오든지 해."
"예, 저는."
"영수증 써줄 것이고 회사 그만두면 돌려준다는 각서도 써준다. 내가 흙 파서 사업 하는 것 아니니까 보증금 내든지 그만두든지 해."
이미 사무실에는 10여 명의 대리운전자가 모여 있었으니 다 들으라고 한 말이다. 말도 못 하고 돌아 나온 김명천에게 안태식이 다가왔다.
"시발, 난 할 수 없이 아까 200 냈다."
사무실 밖의 복도에 마주 보고 섰을 때 안태식이 말을 이었다.
"안 내면 당장 그만두라는데 집으로 돌아갈 수가 있나? 각서는 받았으니까 당분간 이곳에서 뭉개야지."
"운전자들 다 냈어요?"
"응, 거의 다. 두어 명은 돈 안 내고 그만두었어."
원정을 간 사이에 최충식이 설쳐댄 것이다. 담배를 입에 문 안태식이 힐끗 김명천을 보았다.
"왜? 넌 돈 없어?"
"아닙니다. 그게 아니라."
그때 최충식이 안태식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으므로 김명천은 입을 다물었다. 최충식은 보증금을 가져올 때까지 자신에게 일을 시키지 않을 모양이었다.

그날 밤 김명천은 한탕도 뛰지 못했다. 그날따라 일이 밀려서 대기 손님이 계속해서 밀렸지만 서충만이 일을 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분당룸싸롱 김명천은 사무실에서만 꼬박 밤을 새웠는데 기사들이 다 나가고 서충만과 둘이 남았을 때는 꼭 독촉을 받거나 비난을 들었다. 서충만은 김명천이 돈이 없다고 하자 카드를 긁으라고 했다가 나중에는 동료 기사한테 빌리라고까지 했다. 자신이 보증을 서 주겠다는 것이다. 그것도 김명천이 싫다고 하자 결국은 내일부터 나오지 말라는 하고는 입을 다물었다. 서충만은 이틀 동안에 28명의 기사로부터 보증금을 받은 것이다. 보증금을 내지 않은 기사는 오늘부터 출근하지 않은 세 명과 이제 김명천까지 넷이 될 것이었다. 아침 5시가 조금 넘었을 때 기사들은 실어 나르던 회사 승합차가 들어온 것으로 일과가 끝이 났다. 자리에서 일어선 서충만이 승합차 키를 쥐더니 손가방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장기사가 사무실 열쇠 잠그고 퇴근해."
서충만이 나이든 장기사에게 말하고는 틱으로 선반을 가리켰다.
"열쇠는 저기 있어. 그리고 라면 먹으려면 박스에 있으니까 끓여 먹고."
"아이구, 그러지요."
장기사가 반색을 했고 두어 명은 웃었다. 아마 그들은 라면에 소주를 마시면서 고스톱을 칠 것이었다. 지금까지 서충만이 열쇠를 맡겨놓고 먼저 나간 것은 처음이었다. 밖으로 나온 서충만이 승합차의 문을 열고 들어섰을 때 반대쪽 문이 열리면서 김명천이 탔다.
"어? 넌 왜?"
이맛살을 찌푸린 서충만이 묻자 김명천은 정색하고 말했다.
"사장님하고 같이 가려구요."
"어딜?"
"그냥 가시는 데까지."
서충만이 이놈 봐라? 하는 표정으로 눈을 치켜떴다가 곧 시동을 걸었다. 차량 통행이 뜸한 도로에 들어서자 서충만은 차에 속력을 내었다. 거친 운전이었다. 차가 강북 강변도로에 들어설 때까지 김명천은 물론이고 서충만도 입을 열지 않았다. 차가 마포대교 옆을 지났을 때였다. 김명천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늘 저녁에 출근 하실 거죠?"
그 순간 차의 속력을 줄인 서충만이 머리를 돌려 김명천을 보았다. 아직 차 안은 어두웠지만 서충만의 번들거리는 눈은 뚜렷하게 드러났다.
"그건 왜 물어?"
낮았지만 배에 힘을 넣은 목소리였다. 김명천이 서충만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며 대답했다.
"그냥요."
"왜? 보증금 낼 거냐?"
"아닙니다."
"그럼 왜?"
"출근하셨으면 해서요."
"이 자식."
그리고는 서충만이 다시 와락 차에 속력을 내었다. 김명천도 잠자고 있었으므로 차 안에는 무겁고도 거친 분위기가 덮여졌다. 앞을 노려보는 서충만의 얼굴은 굳어져 있었다. 서충만이 차를 세운 곳은 자유로에서 조금 벗어난 행주산 성입구의 샛길이다. 이곳은 평소에도 한적한 곳이어서 주위에는 차량도 보이지 않았다. 시동까지 끈 서충만이 머리를 돌려 김명천을 보았다.
"너, 재희하고 어떤 관계야?"
서충만이 던지듯 묻자 김명천은 눈을 동그렇게 떴다.
"어떤 관계라니요?"
그러나 이제 김명천의 가슴은 뛰었다. 이재희의 말이 맞은 것이다.
그 순간이었다. 서충만이 주머니를 뒤지는가 했더니 갑자기 어둠 속에서 희게 빛나는 물체가 김명천의 턱 밑에 붙여졌다. 칼이다. 날이 희고 길이가 30센티는 되어 보이는 것이 횟칼 같았다.
"건방진 놈."
서충만이 잇사이로 말하더니 차거운 금속이 김명천의 목에 닿았다.
"네 목을 긋고 가버릴까? 어차피 쫒기게 될 인생이니 너같은 놈 하나 쥑이고 떠나도 달라질 것 없다."
"떠나실 작정이군요."
칼이 턱을 받치고 있어서 머리를 조금 든 김명천이 느릿하게 말했는데 그것이 서충만의 화를 돋운 것이 분명했다.
"이 새끼가."
하면서 칼이 목을 꽉 조였고 피부가 따끔거렸다. 칼날에 베어진 것이다.
"이게 뒤지려고 환장을 한 놈이구만. 아니면 모자란 놈이든지."
"왜 불쌍한 대리기사들 등을 칩니까? 모두 실업자 신세로 겨우 살고 있다는 걸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에이, 이 새끼를 그냥."
목이 다시 따끔거렸으므로 김명천은 어금니를 물었다가 풀었다.
"그렇게 사시면 안 됩니다."
김명천이 다시 말했을 때 서충만의 인내심은 한계를 넘어버렸다. 눈을 치켜뜬 서충만이 칼을 고쳐 쥐었다. 그 와중에 목을 긋지 않고 어깨나 다리를 찌르겠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으니 아주 돌아버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김명천도 그 순간을 기다렸다. 목에서 칼이 떼어진 순간 주먹으로 김명천의 얼굴을 쳤는데 맞는 순간 퍽 소리와 함께 충격이 전해져왔다. 정통으로 두 눈 사이를 친 것이다.
"어이우."
하면서 서충만이 머리를 뒤쪽 창에 부딪치며 신음을 뱉았을 때 김명천은 수도로 팔을 쳐서 칼을 떨어뜨렸다. 김명천이 옆에 놓은 서충만의 손가방을 집었다. 가방 안에 돈이 들어있는 것이다.
"내가 돈을 돌려주지요."
김명천이 문을 열고 나오면서 말했다.
"그러니까 사장님은 오후에 그대로 출근 하셔도 될 겁니다."
하지만 자신은 이것으로 대리운전 기사 생활을 끝내야 될 것이었다. 가방을 움켜쥔 김명천이 차 밖으로 나왔을 때였다. 차에 시동이 걸리면서 승합차는 와락 출발했다. 전조등도 켜지 않고 맹렬하게 달리던 승합차는 길가의 도랑에 빠질 것 같더니 곧 우회전을 해서 사라졌다. 길게 숨을 뱉은 김명철은 아직도 따끔거리는 목에 손바닥을 붙였다. 그러자 손바닥에 끈적이는 액체가 묻으면서 목이 더 따끔거렸다. 주위는 차량 통행이 없었으므로 김명천은 큰길까지 2백미터 정도의 거리를 걸었다. 큰길가의 가게 앞에 닿았을 때 마침 지나치는 승용차가 있었으나 김명천이 손을 들기도 전에 눈치를 챘는지 더 속력을 내어 지나갔다. 김명천은 가게 앞의 빈 상자 위에 앉았다. 가게는 불만 켜놓았을 뿐 주인은 안에서 자고 있는지 비어 있었다. 오전 6시 반이 되어가고 있었다. 김명천이 생각난 듯 무릎 위에 놓인 서충만의 손가방을 열어 본 것은 잠시 후였다. 손가방의 지퍼를 연 김명천은 눈을 크게 떴다.
가방 안에는 장부가 들어 있었다. 한쪽에 넣어둔 그 날 입금된 현금과 수표가 대충 계산해서 2백만 원이 조금 넘었다. 그뿐이었다. 서충만이 대리기사들한테서 겉은 보증금은 없는 것이다. 멍한 표정으로 가방을 내려다보던 김명천은 퍼뜩 시선을 들었다. 문득 이 손가방이 거추장스러운 짐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기사들한테 돌려줄 돈도 없는 상황이니 차라리 이 가방은 없는 것이 낫다.

그날 밤 12시가 되었을 때 합숙소에서 누웠다 앉았다를 반복하던 김명천은 마침내 일어섰다. 합숙소 밖으로 나와 전화를 했을 때 안태식은 금방 응답했다.
"어, 너, 어디야?"
했다가 안태식은 송화구에다 한숨을 크게 뱉었다.
"너, 돈 안 내기 잘했다. 어이구."
"무슨 일 있습니까?"
조심스럽게 김명천이 묻자 안태식이 다시 한숨소리를 냈다.
"사기당했어. 사장 놈이 보증금 갖고 날랐어. 지금 사무실은 난리가 났다."
"아니, 그럼."
목소리를 높였던 김명천이 어금니를 물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놀란 척했던 자신이 싫어졌던 것이다.
"그 새끼 집도 모르고 주민등록 번호도 아는 사람이 없어. 우린 철저하게 당한 거야. 아이구."
안태식은 개인택시를 사는 것이 마지막 희망이었다. 집안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평온하고 화목할 리가 없다. 대리기사의 반 이상이 갖가지 사정으로 혼자 사는 사내들인 것이다. 안태식은 사무실에서 전화를 받는지 소음이 울려오고 있었다. 고함소리와 함께 집기가 부숴지는 소음까지 들렸다.
"저, 제가 그쪽으로 가지요."
"어, 그래."
건성으로 대답한 안태식이 전화를 끊었을 때 김명천의 얼굴에 선뜻한 물기가 느껴졌다. 머리를 든 김명천은 가로등빛 안으로 눈발이 퍼져 있는 것을 보았다. 첫눈이다. 첫눈 오는 날 대리운전 사무실은 난리가 났다. 김명천이 찾아갔을 때 사무실 집기는 다 부서졌고 유리창까지 깨져 있었다. 그 유리창이 깨지는 바람에 사무실에서 소동을 피우던 기사들 대부분이 도망을 쳐버렸고 남은 사람은 서너 명뿐이었다. 그들도 내일 아침에 빌딩 관리실 직원들이 출근 하기 전에는 모두 사라질 것이었다. 유리창 값은 물어내야 할 것이기 때문이다. 김명천을 보자 안태식은 씁쓸하게 웃었다.
"깨끗해. 그 임재희 그년도 한패였어. 어제부터 나오지 않는걸 보면 확실해."
안태식은 술을 마셨는지 입에서 술 냄새가 풍겨왔다.
"큰일 났다. 이거, 어떻게 살아야 하나?"
복도로 나온 안태식이 충혈된 눈으로 김명천을 보았다.
"그래도 넌 딸린 식구가 없어서 다행이다. 난 학교 다니는 애들만 줄줄이 셋이야. 그리고,"
안태식의 두 눈이 흐려졌다.
"난 마누라가 파출부로 나가 모은 돈으로 보증금을 냈다."
"그 나쁜 놈은 벌을 받을 겁니다."
"넌 참 순진한 놈이다."
눈물이 글썽한 눈으로 풀석 웃은 안태식이 곧 소매로 눈을 닦았다.
"난 그런 말은 오랜만에 듣는다 야. 나쁜 놈이 벌을 받는다는 말 말이다."
"형님, 어디 가서 해장술이나."
"난 더 이상 술 못 마셔."
그리고는 안태식이 다시 허탈하게 웃었다.
"오늘 일당 벌어서 내일 딸내미 운동화 사준다고 했는데 야단났구만."
"형님, 잠깐만."
나이 차가 10여 년이나 났으므로 김명천은 안태식에게 자주 형님이라고 안 불렀다. 계단 구석으로 안태식을 데려간 김명천이 점퍼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어 안태식의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그냥 받으세요. 그리고,"
벌써 반쯤 몸을 돌린 김명천이 생각난 듯 덧붙였다.
"여유 생기면 갚으세요."
어젯밤 서충만의 손가방에 들어 있던 돈이다. 의심할까 봐서 여유 생기면 갚으라고 했다.

오전 10시면 직장인이 가장 바쁘게 일하는 시간이다. 작년에 건설 공사장에서 잡부로 일할 적에 김명천은 이 시간이면 건설회사 직원들이 회의를 하느라 테이블에 둘러앉아 있는 것을 창밖에서 훔쳐보았었다. 그래서 김명천은 강남대로 아래쪽에 위치한 이성빌딩 주위를 맴돌기만 하고는 선뜻 전화를 하지 못했다. 아성 빌딩은 25층 건물로 10층부터 12층까지가 태양교역 사무실이었다. 김명천은 지금 손때가 묻어 더러워진 명함의 주인공을 만나려고 하는 것이다. 지난번에 대림동의 고급 주택가로 대리운전을 해주었던 손님이다. 대림동의 8차선 도로 옆 건물담장에다 소변을 갈긴 주인공 윤수길이 바로 태양교역의 사장이었다. 그때는 건성으로 명함을 받았지만 김명천은 그가 자신을 기억해 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다. 그는 김명천이 마음에 든다면서 새 직장을 알아보고 싶다면 전화를 하라고 했던 것이다. 빌딩 옆의 건물에 기대선 김명천이 윤수길에게 전화를 한 것은 그로부터도 20분쯤이 지난 10시 40분 경이었다. 비서실 여직원이 누구냐고 꼬치꼬치 물어서 할 수 없이 대리운전자이며 언제 모셨다는 것까지 다 밝혀야만 했는데 김명천의 어깨는 늘어지고 있었다. 여비서가 기다리라고 하고는 한참 동안 전화가 먹통이 되었으므로 저절로 쓴웃음이 배어 나왔다. 윤수길은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었고 설령 기억 한다고 해도 요즘 세상에 술 마시고 허튼소리 한 것에 책임을 지는 놈이 어디 있겠는가? 그때 수화구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울렸으므로 김명천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 익산 촌놈 아니냐? 너, 지금 어디 있어?"
그 순간 김명천의 코끝이 찡해지면서 숨이 겹으로 마셔졌다. 사장님은 자신의 고향까지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예, 저는 지금 회사 옆에 있습니다."
다급하게 대답했을 때 윤수길이 흥흥 웃었다.
"그럼, 12층 사장실로 올라와라. 내가 비서실에다 이야기해 놓을 테니까."
"감사합니다. 사장님."
"감사하긴 뭐가?"
그리고는 전화가 끊겼으므로 김명천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러나 수없이 좌절을 겪은 터라 미리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만 했다. 다 되었다가 마지막 순간에 어긋난 적이 다섯 번도 더 되었고 그 후유증은 컸기 때문이다. 김명천이 12층 복도에 내렸을 때 붉은색 양탄자가 깔린 복도는 조용했다. 복도 옆방에는 임원실과 비서실, 사장실의 팻말이 붙여져 있었는데 김명천에게는 위압적인 분위기였다. 비서실 앞으로 다가간 김명천은 자신의 옷차림을 내려다보았다. 초겨울이었는데 검정색 춘추복 정장 차림에 시장에서 산 2천 원짜리 넥타이를 매었지만 모두 진한 색상이어서 얼른 알아채지는 못할 것이었다. 어깨를 편 김명천이 노크를 하자 곧 안에서 여자의 맑은 응답 소리가 울렸다. 김명천은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러자 넓은 비서실에 앉아 있던 세 명의 여직원이 일제히 머리를 들고 김명천을 보았다. 모두 TV 탤런트 같은 미인들이다.
"조금 전에 전화 하신 분 맞죠?"
여자 하나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웃음 띤 얼굴로 물었다. 상냥한 표정이었으나 머리만 돌리면 0.1초 사이에 표정이 바뀌어질 것이었다.
"예, 제가 김명천입니다."
"기다리고 계세요. 이쪽으로."
여자가 옆쪽 문 앞으로 앞장을 서서 안내했다. 1미터 70 가까운 신장에 몸매도 모델 같다. 그리고 향수 냄새도 맡아졌다.

"어, 촌놈, 어서 와라."
김명천이 들어섰을 때 윤수길이 그렇게 말했다. 웃음 띤 얼굴이었다.
"거기 앉아."
턱으로 앞쪽 소파를 가리켜 보인 윤수길이 여직원에게 지시했다.
"마실 것 가져와."
"예, 사장님."
여직원이 방을 나가자 윤수길이 김명천을 보았다.
"왜? 대리운전에서 짤린 거냐?"
"아닙니다. 사장님."
"싫증 났어?"
"회사가 없어졌습니다."
"그래?"
더 이상 알 필요 없다는 듯 머리를 끄덕인 윤수길이 눈을 가늘게 떴다. 밤에 본 모습과는 전혀 딴판으로 눈빛이 강했고 태도에는 위엄이 풍겨졌다.
"너, 이곳이 무슨 일하는 회사인 줄 알고 온 거냐?"
"모릅니다. 사장님"
그러자 윤수길이 피식 웃었고 그때 여직원이 들어와 그들 앞에 인삼차를 내려놓았다. 여직원이 다시 방을 나갔을 때 윤수길이 은근한 시선으로 김명천을 보았다.
"너, 무슨 일이건 할래?"
"예?"
했다가 김명천은 침을 삼키고는 자리를 고쳐 앉았다. 어느덧 얼굴이 굳어져 있다.
"예, 맡겨만 주시면 어떤 일이건 하겠습니다. 사장님."
"너, 그때 일당 제일 많이 번 날이 20만 원이라고 했던가?"
윤수길이 다시 눈을 가늘게 떴다.
"그렇지?"
"예, 그렇습니다. 사장님."
"여기선 잘만하면 하루에 1백만 원도 번다. 하지만.."
말을 그친 윤수길이 정색하더니 의자에 등을 붙였다.
"넌 촌놈이라 안 되겠다."
"예?"
"영업직은 안되겠단 말이야."
다시 침만 삼킨 김명천에게 윤수길이 낮게 말했다.
"태양교역은 유통회사야."
그리고는 희미하게 웃었다.
"아래층에 가보면 영업직 사원들이 수백 명이 있지. 지금도 바쁘게 일하고 있을 거다. 제품을 판매하기 위해서 말이야."
"아아. 예."
"우린 기초 화장품과 건강식품을 유통시키지. 마진이 많아."
윤수길이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한 세트에 5백만 원이야. 사원이 되려면 먼저 한 세트를 사야 된다. 무슨 말인지 이제는 알겠지?"
"예, 압니다."
말로만 듣던 피라밑 조직이다. 윤수길을 완곡하게 표현했지만 태양유통은 다단계 회사인 것이다. 김명천의 표정을 본 윤수길의 얼굴에 다시 웃음기가 떠올랐다.
"그리고 사원 두 명을 끌어오면 판매액의 20%를 먹고 팀원이 10명이 되면 팀장이 된다. 그때는 월급쟁이 노릇 하는 것보다 낫지. 간단해."
김명천은 소리죽여 숨을 뱉었다. 수중에 쥐고 있는 돈은 3백만 원 정도였고 그 돈은 어머니 전세방 인상분으로 세상없어도 보내드려야 한다. 그리고 일가친척은 물론이고 친구도 없는 서울 바닥에서 끌어 올 사람도 없는 것이다. 마음을 굳힌 김명천이 윤수길을 보았다.
"사장님, 저는.."
"안다. 촌놈."
김명천의 말을 자른 윤수길이 정색했다.
"넌 내 보디 가드겸, 비서 겸, 운전사로 일하도록 해."

"얘는 내 경호원겸 운전사야, 하지만."
윤수길이 여비서 셋을 향해 엄숙한 표정으로 말했다.
"대외적으로는 비서로 부른다. 알았나?"
"예, 사장님."
여비서 셋이 거의 동시에 꽃잎 같은 입을 벌려 대답하자 윤수길이 김명천을 돌아보았다.
"비서실 선임은 여기 있는 문대리다. 문대리가 설명해 줄 거다."
그리고는 윤수길이 사장실로 들어가자 김명천은 머쓱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그때 문대리라고 소개된 여자가 말했다.
"우선 여기 앉아요."
옆쪽 소파를 손으로 가리켜 보인 문대리가 웃음 띤 얼굴로 김명천을 보았다.
"김명천씨라고 하셨지요?"
"예, 그렇습니다."
"나이는 어떻게 되세요?"
"스물여덟입니다."
"그럼 언니 오빠네."
앞쪽 자리에 앉아 아까 김명천을 안내했던 여자가 말했다.
"시끄러."
가볍게 말을 자른 문대리가 정색했다.
"전 문지애라고 하구요. 얘는 오수영이, 쟤는 서미나."
하나씩 소개해준 문지애가 말을 이었다.
"여기가 대충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이야기 들으셨죠?"
"예, 들었습니다."
"사장님이 김명천씨를 잘 보신 모양이네요. 경호원 겸 비서로 임명하신 걸 보니까요."
"인상이 순박 하잖우?"
앞쪽 자리는 서미나였다. 서미나가 다시 까불었다.
"체격도 좋고."
서미나가 김명천에게 눈웃음을 쳤다. 서미나에게 눈을 흘겨 보인 문지애가 김명천을 보았다.
"지금은 한가하지만 순발력 있게 움직여야 해요. 일에 실수가 있으면 안 되구요. "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리고."
힐끗 김명천의 가슴께에다 시선을 주었던 문지애가 쓴웃음을 짓고 말했다.
"저, 내가 가불해 드릴 테니까 백화점에 다녀오세요."
"백화점에 무슨 일로?"
그러나 문지애는 대답하지 않고 서미나와 오수영을 번갈아 보았다.
"오후 스케쥴 누가 없니?"
"나."
하고 서미나가 대뜸 나섰다.
"내가 비었어."
"아니, 참, 넌 사장님하고 B그룹 회의에 가야잖아?"
눈을 치켜뜬 문지애가 목소리를 높였다.
"너, 정말 덜렁거릴 거야? 회의 준비했어?"
"했어."
금방 기가 죽은 서미나가 물러났을 때 문지애의 시선이 오수영에게 옮겨졌다.
"수영이 네가 김명천씨하고 백화점에 가."
"응."
오수영이 그때 처음으로 말했다. 그리고는 처음으로 시선을 돌려 김명천을 정면으로 보았다. 눈동자가 머루처럼 새까맸고 루즈를 칠하지 않았는데도 입술은 붉었다. 속눈썹이 짙어서 눈에 그늘이 져 있는 것처럼 보여졌다. 오수영의 시선을 받은 김명천이 어깨를 폈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져 있었다.
"여기 있다."
문지애가 싸인한 종이를 오수영에게 보이며 물었다.
"백만 원이면 될까?"
"요즘 메이커 정장이 얼만데."
서미나가 불평하듯이 말했을 때에야 김명천은 이유를 알았다. 자신의 옷을 사주려는 것이었다.

사장실에 들어갔던 문지애가 웃음 띤 얼굴로 나오더니 김명천과 오수영을 번갈아 보았다.
"컨펌 받았어. 오후 3시까지는 돌아올 것, 알았지?"
마지막 말은 오수영에게 한 말이다. 문지애는 윤수길에게 백화점에 간다는 허락을 받은 것이다.
"자금은 접대비에서 처리하기로 했으니까 카드 가져가."
"그럼 같이 점심 먹겠네."
서미나가 앞만 보며 말했다.
"아이, 짜증 나. 바람피우고 싶어."
무슨 속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김명천은 비서실의 서열은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문지애가 책임자였고 오수영, 서미나의 순서였다. 그리고 비서실의 분위기는 자유롭기는 했지만 질서는 잡혀 있었다. 서미나는 밝고 활달한 성격인 것 같았고 오수영은 차분하고 말수가 적다. 책임자인 문지애는 사장의 신임을 받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사장실에 들어간 지 20초도 안 되어서 결재를 받고 나온 것을 봐도 그렇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간 오수영이 흰색 중형차 앞에 서더니 주춤 김명천을 보았다. 오수영의 차인 모양이었다.
"운전하실래요?"
"대리운전 말입니까?"
저도 모르게 불쑥 그렇게 묻자 오수영이 피식 웃었고 김명천도 어색하게 웃었다.
"미안합니다. 버릇이 되어서."
"아뇨, 괜찮아요. 그럼 내가 하죠."
운전석에 오른 오수영은 익숙하게 차를 후진시키더니 지하 통로를 타고 올랐다. 능숙한 솜씨였다. 차가 대로에 나왔을 때 오수영이 그라스 박스에서 선글라스를 꺼내 썼다. 그러자 전혀 다른 인상이 되었다. 요염했다.
"버릇이 되어서 그래요."
앞쪽을 본채 오수영이 말했다.
"이제는 밤에도 선글라스를 껴요."
"멋있기만 하면 다 이해가 됩니다."
불쑥 김명천이 말하자 오수영이 이를 드러내고 소리 없이 웃었다. 멋있었다.
"김명천씨는 여자들이 좋아하겠어요."
"촌놈이라고 갖고 놀지요."
"하하."
이제는 짧게 소리 내어 웃은 오수영이 머리를 돌려 김명천을 보았다.
"애인 있어요?"
"돈 없어서 못 만들었습니다."
"아무리 그렇다고."
"난 허세 부리는 게 싫어서."
그러자 오수영의 입술에 웃음기가 사라졌다. 눈은 짙은 선글라스에 가려져 있어서 표정의 반이 가려져 있다.
"조금 있으면 아시게 되겠지만 아까 언니 말대로 순발력이 필요해요. 그리고 허세도 부려야 되고."
오수영이 말을 이었다.
"한 달 후에는 회사 정리하고 지방으로 내려가게 될 거예요."
긴장한 김명천이 오수영을 보았다. 오수영은 앞쪽을 바라본 채 입술 끝을 조금 올리며 웃었다.
"그룹별 확장 한계에 닿고 있거든요. 한계점에 이르면 이삼일 사이에 무너지는 것이 이 조직의 허점이죠."
김명천도 앞쪽을 향한 채 머리를 끄덕였다.
"그럼 도망치는 것이군요."
"하지만 범법 사실은 없죠. 모두 정상적인 방법이었고 이윤 배분을 했으니까."
"지금 백화점에 나하고 같이 가는 것도 회사 내막을 말해주려는 것이군요."
"무디진 않네요."
그리고는 분당룸싸롱 오수영이 싱긋 웃었다. 물론 앞쪽을 바라본 채이다.
"그래요. 우린 한가하지 않아요. 만일 동참하기 싫으면 여기서 내려도 돼요."
물론 김명천은 눈을 치켜뜬 채 내리지 않았다. 그것은 자존심 때문이 아니다. 그렇다고 범법은 아니라지만 야반도주를 할 계획까지 세워놓고 있다는 태양교역에 미련이 있는 것도 아니다. 미리 겁부터 먹고 내뺄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한 오수영은 김명천을 잘못 보았다. 촌놈 김명천은 노숙 생활까지 겪으면서 이제 끈질긴 생명력을 갖춘 인간이 되어 있는 것이다. 오수영이 대답을 기다리는 듯 시선을 주었으므로 김명천이 웃어 보였다.
"비서실 세 분은 사장님하고 끝까지 같이 행동하는 팀입니까?"
"그렇죠."
오수영이 크게 머리를 끄덕이더니 안심이 된다는 듯이 입으로 웃었다. 코 위쪽은 선글라스에 가려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룹장을 맡은 임원 세 분이 있지만 서로 믿지는 않아요. 아마 이번 일을 끝으로 갈라설 거예요."
"나한테 그런 말을 다 털어놓는 이유는 뭡니까?"
"짐작하고 계시겠지만 서울에 연고가 없는 촌놈이시기 때문이죠."
그리고는 오수영이 다시 입으로만 웃었다.
"미안해요. 자주 촌놈이라고 해서, 하지만 그 말은 칭찬이나 같으니까 그렇게 받아들이세요."
"사장님하고 같이 행동하신 지 얼마나 되었습니까?"
"1년."
그리고는 차가 신호등에 걸려 멈춰 섰으므로 오수영이 머리를 돌려 김명천을 보았다.
"이번 일이 끝나면 김명천씨한테도 수당이 지급될 거예요. 역할에 따라서 다르지만 아마 상당한 거금이 될 겁니다."
심호흡을 한 김명천은 앞쪽을 본채 대답하지 않았다. 둘이 같이 백화점에서 쇼핑을 한다는 부드러운 분위기는 이미 깨어졌고 신경이 팽팽하게 긴장되었다. 그러나 이상하게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다만 이렇게 괜찮은 여자들이 거침없이 군의 작전 같은 이야기를 한다는 것에 조금 소외감이 느껴졌을 뿐이다. 신호가 풀려 차를 다시 발진시키면서 오수영이 말했다.
"속이고 속고, 잡아먹고 잡아 먹히는 것이 사회생활이죠. 내가 가만있으면 당하게 되더라구요."
백화점 주차장에 차를 세운 오수영은 마치 애인과 쇼핑하는 여자처럼 행세했다. 남성복 매장에 가더니 메이커 제품으로 연회색 정장 양복과 셔츠, 넥타이를 골라 주었는데 넥타이 한 개 값이 김명천이 입은 양복 두 벌 값이었다. 매장에서 옷을 갈아입은 김명천의 모습을 보자 오수영이 환하게 웃었다.
"자기 멋있어."
그리고는 김명천의 춘추복을 봉투에 구겨 넣더니 매장 점원에게 건네주었다.
"이건 버려주세요."
옷이 날개라는 말이 맞다. 특히 주머니가 빈약한 사람들에게는 더 그렇다. 김명천은 두툼한 메이커 제품의 동복이 어깨를 누르는 느낌을 받고는 만족한 숨을 내쉬었다. 매장을 떠났을 때
오수영이 김명천의 팔짱을 끼더니 웃었다.
"전혀 분위기가 달라졌어요."
오수영은 옷을 갈아입히고 나서야 팔짱을 낀 것인데 그것이 전혀 어색하지가 않았다. 그리고 김명천 또한 마찬가지였다. 4만 원을 주고 산 싸구려 춘추복을 입은 자신에게 오수영이 팔짱을 끼어준다면 더 불편했을 것이었다.
"오후 3시까지 시간 있어요. 우리 뭘 할까요?"
오수영이 나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오수영은 논현동 시장 근처의 한정식집으로 김명천을 데려갔는데 고급 식당이었다. 궁중 요리를 전문으로 하는 곳으로 방에 안내되었을 때 오수영은 익숙한 듯 요리를 주문했다.
"몇 번 와봤어요. 임원들하고,"
방석 위에 비스듬히 앉은 오수영이 차분한 얼굴로 김명천을 보았다.
"하지만 한 달 후부터는 올 수가 없게 되었지요. 당분간 잠수함을 타야 될 테니까."
"법을 어기지는 않는 것이라면 도망칠 필요는 없지 않습니까?"
"상습적이기 때문에, 그리고 모두 전과가 화려해요."
쓴웃음을 지은 오수영이 엄지손가락을 구부려 자신의 얼굴을 가렸다.
"저도 이번이 세 번째가 되거든요."
"그런 이야기를 오늘 처음 만난 나한테 털어놓는 이유는 뭡니까?"
"명천씨 같은 사람이 필요했기 때문이죠."
오수영이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끝날 때 재빨리 움직여주는 남자가 있어야 돼요."
"날 어떻게 믿고?"
"당장에 일거리도 없는 남자가 이런 일을 맡으면 백퍼센트 다 억셉트한다는 걸 알죠. 그러지 않는 남자는 없을걸요?"
"그럴까요?"
"생각해 보세요. 법을 어기지도 않는 데다 시키는 대로만 해주면 목돈이 들어오는데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어요?"
그때 종업원 둘이 상다리가 휘어지도록 차린 음식상을 들고 들어섰으므로 그들은 말을 그쳤다. 궁중 요리는 처음 보게 된 김명천이다. 신선로에는 고깃국이 끓고 전에다 갖가지 찬이 놓여 있었지만 김명천의 눈에는 모양만 낸 전시품 같게 보였다. 마치 마네킹처럼 생명력이 느껴지지 않았다. 수저를 든 오수영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하지만 이런 일은 계속할 것은 못 되죠. 난 몇 번만 더하고 이민이나 갈까 봐요."
"어디로 말입니까?"
"호주나 뉴질랜드로."
"그곳은 왜?"
"좋잖아요? 경치가."
그래서 김명천은 오수영이 이민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연구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경치만 좋다고 이민을 갈만큼 오수영이 늘어진 팔자가 아니다. 궁중 요리로 점심을 먹고 나왔을 때는 오후 1시 반이었다. 물론 식비 계산도 오수영이 카드로 했는데 차에 올랐을 때 머리를 돌려 김명천을 보았다.
"한 시간 반 시간이 남았어요. 우리, 섹스할래요?"
정색한 오수영은 김명천의 시선을 받고도 태연했다. 당황한 김명천이 먼저 시선을 내렸고 귀끝이 달아올랐다.
"거, 농담 쎄게 하시네."
"그냥 간단히 몸을 풀자는 건데, 싫으면 관두고."
주차장을 나온 오수영이 대로에 차를 진입시키며 말했다.
"난 가끔 스트레스 풀려고 섹스를 해요. 상대는 아무나 근처에서 고르고."
"그럼 진담입니까?"
"아 아저씨는 뻔히 아시면서."
쓴웃음을 지은 오수영이 손바닥으로 입을 가리더니 하품을 하고 말했다.
"하긴 내가 하자고 했을 때 예, 그럽시다, 하고 나서는 서울 얌체들보다는 조금 낫네."
"시효는 지났습니까?"
그러자 오수영이 앞쪽을 본채 깔깔 웃었다.
"지났어요. 다음 기회에 봅시다."
김명천은 의자에 등을 붙이고는 심호흡을 했다. 갈수록 태산이다. 점점 더 수렁으로 빠져드는 기분도 드는 것이다.

그날 밤, 김명천은 사장 윤수길을 대림동 집에까지 태워다줬다. 물론 오늘은 사장 승용차 기사로서 첫 일을 한 것인데 차를 차고에 넣고 나왔을 때 윤수길이 불렀다.
"야, 나하고 소주 한잔하자."
윤수길이 턱으로 길 아래쪽을 가리켰다.
"내가 옷 갈아입고 나올 테니까 넌 모퉁이의 식당에서 기다리고 있어."
"예, 사장님."
오늘 밤 윤수길은 회사에서 9시까지 일하다가 곧장 퇴근할 길이었다. 회사에서 야식으로 초밥을 시켜 먹으면서 비서와 임원 셋까지 모여 심각한 표정으로 회의를 한 것이다. 모퉁이의 식당은 허름한데다 주방까지 두 평이 안돼 보였는데 손님은 한 명도 없었다. 김명천이 소주 한 병을 시켜놓고 기다린 지 10분쯤이 지났을 때 윤수길이 들어섰다. 츄리닝에 운동화 차림이었다. 주인에게 이것저것 안주를 시킨 윤수길이 갈증이 난 듯 앞에다 따라놓은 소주를 훌쩍 마시더니 입을 열었다.
"대충 이야기 들었지?"
"예, 사장님."
긴장한 김명천이 몸을 굳혔다. 그러자 윤수길이 빈 잔에 술을 채우면서 말했다.
"결국은 사기야, 아래쪽 계단의 회원들은 몽땅 바가지를 쓰게 되는 것이라구. 무슨 말인지 알겠나?"
"알 것 같습니다."
"위로 올라갈수록 받아먹은 횟수가 많다 보니 모두 공모자가 되는 거지."
다시 한 모금 소주를 삼킨 윤수길이 김명천을 보았다.
"앞으로 한 달간은 피크다. 전성기란 말이다. 매출도 올라가고 마진 분배도 많아져, 회사가 아주 활력이 있는 것처럼 보여지고 모두가 그렇게 느끼게 되지."
윤수길의 두 눈이 번들거렸다.
"그리고 그 절정에 오른 순간에 문을 닫아버리는 거다. 모두 한탕을 노리고 뛰어든 년놈들이니까 난 죄책감 따위는 느끼지 않는다."
"제가 할 일은 뭔가요?"
"내 심부름만 하면 돼."
낮게 말했던 윤수길이 곧 쓴웃음을 짓고는 김명천의 옷차림을 훑어보았다.
"오늘 오수영이하고 옷을 사러 나갔을 때 말이야."
"예, 사장님."
"너한테 오수영이가 한번 하자고 하지 않더냐?"
김명천이 눈만 치켜떴을 때 그것을 본 윤수길이 풀석 웃었다.
"역시 그런 모양이군, 그래서 오수영이한테 뭐라고 했냐?"
"아니, 저는."
"알아, 알아."
윤수길이 손을 저었다.
"네가 안 한 지 알아. 정확하게 표현하면 못했겠지. 오수영이는 한번 하자고 하는 것이 버릇이니까. 그리고는 빼는 거지. 그래서 졸지에 병신을 만드는 거지."
탁자 위로 상반신을 굽힌 윤수길이 정색하고 김명천을 보았다.
"네 평은 좋다. 일단은 성공작이야. 첫째 네 분위기가 어리숙해서 여자들 경계심이 풀어지는 것이 장점이다. 특히 비서실의 세 여우들이 너에 대해서 그런 느낌을 받는 모양이더구만."
윤수길이 술잔을 들었으나 마시지는 않았다.
"임원 셋은 모두 전과자고 경력이 나보다 더 화려한 작자들이야. 그리고 비서 셋은 그자들의 보조원 겸 감시역이지."
목소리를 낮춘 윤수길이 말을 이었다.
"네가 여자들을 감시해라. 그것들이 임원들하고 손발을 맞추고는 날라버리면 나는 꽝 된다. 나만 병신이 되는 거지."

김명천도 요즘 세상에서 순수한 호의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경험으로 겪어왔다. 이용 가치가 있었기 때문에 백화점에서 양복도 사주었을 것이고 궁중 요리도 먹였을 것이었다. 정상적인 직장 생활에 있어서도 이용 가치가 많은 사람은 그만큼 대우를 더 받는다. 대리운전 회사에서 간신히 사기를 당하지 않고 유통회사로 옮겼나 했더니 이곳은 조직적인 사기 회사였다. 늑대 피하고서 범 만난 꼴이 되었다.
그날 밤 김명천이 영등포 시장 앞의 커피숍 겸 카페에 도착했을 때는 11시 반 경이었다. 카페 안에는 이미 임재희가 기다리고 있었는데 표정이 밝았다.
"왠 일이야? 이 시간에 만나자고 하는 건 실례인지 몰라?"
김명천이 앞에 앉자 종알대면서도 눈은 웃고 있었다.
"재주도 좋아. 벌써 유통회사에 들어가다니."
그리고는 임재희가 눈을 가늘게 뜨고 김명천의 옷을 훑어보았다.
"옷 어디서 샀어?"
"압구정동 국제백화점에서."
"어머나."
정색한 임재희가 넥타이를 손끝으로 뒤집어 보더니 눈을 치켜떴다.
"모두 브랜드 제품이군. 백만 원 이상 깨졌겠는데."
이미 윤수길과 소주를 세 병 나눠 마시고 온 길이었지만 김명천은 종업원에게 맥주를 시켰다.
"그래. 오늘 한턱 쓰신단 말이지?"
임재희가 혼잣소리처럼 말했지만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서충만이 도망치기 전날에 임재희는 회사를 그만두었지만 의심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전화번호도 아는 사람이 없었으므로 연락이 온 곳도 없다는 것이다. 맥주가 날라져 왔을 때 김명천이 입을 열었다.
"이곳은 조직 사기 회사야. 대리운전 회사 사기쯤은 비교도 되지 않는다구."
놀란 임재희가 맥주잔을 내려놓았을 때 김명천은 길게 숨을 뱉았다.
"시발, 나는 사장한테 잘 보여서 한탕을 할 때 심부름만 잘하면 한몫 챙기게 될 것 같다."
"좋은 일이네."
눈동자를 치켜뜬 임재희가 낮게 말했다.
"넌 멍청한 인상이야. 그래서 사람들한테 동정심을 불러일으키나 봐. 바로 내가 그랬거든."
"뭐? 멍청해?"
"바보 같다고 할까."
"야. 내가 심각해."
정색한 김명천이 임재희를 보았다.
"서울 바닥에 이 문제를 상의할 사람이 너밖에 없어. 챙피하지만."
"사장한테 잘 보였다면서?"
"오늘 밤에도 둘이 술 마시고 헤어졌어."
"그럼 잘됐네. 뭐."
맥주를 한 모금 삼킨 임재희가 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한몫 챙기겠다. 나 같으면."
"그래?"
"못 챙기는 놈이 병신이지."
"난 회사 내막을 몰라. 사장이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고 했어."
"그럼 잡혀도 핑계 댈 수 있겠다."
그리고는 임재희가 쓴웃음을 지었다.
"그럼 나 만나서 도움이 되셨나? 앞으로의 방향에 대해서 말이야."
"너 혹시."
헛기침을 한 김명천이 굳어진 얼굴로 임재희를 보았다.
"오늘 밤 시간 있어? 나하고 같이 외박하지 않을래?"
그 순간 임재희가 퍼뜩 눈을 치켜뜨더니 곧 얼굴 근육이 천천히 풀어졌다. 그리고는 턱을 들고 소리 내어 웃었다.
"싫어."
웃음을 그친 임재희가 말했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얼굴을 새침하게 만들었다.
"너 같은 촌놈하고는 싫어."
"어쨌든 나와서 이야기 들어줘서 고맙다."
김명천이 정색하고 사례하자 임재희가 눈을 깜박였다. 뭔가 놓고 온 것 같은 표정이었다. 임재희의 시선을 받은 김명천이 말을 이었다.
"뭐, 기대하지도 않았어. 예의상 한번 그렇게 말해본 것뿐이야."
"야, 이, 촌놈아."
눈을 치켜뜬 임재희가 으르렁거리듯 말했다가 허엉하고 웃었다.
"많이 늘었네. 촌놈이."
"너, 나이도 어린것이 까불면 혼나."
그리고는 김명천이 은박지를 펴고 마른안주를 담았다. 집에 가져가서 먹으려는 것이다.
"그만해."
이맛살을 찌푸린 임재희가 김명천의 손을 밀었다.
"놔두란 말이야. 챙피해."
"다른 것들 눈치 보고 살 필요 없어."
"놔둬, 자줄게."
불쑥 임재희가 말했으므로 김명천은 움직임을 멈췄다.
김명천이 임재희의 입술을 똑바로 보았다. 임재희의 시선은 김명천의 넥타이 매듭 부분에 꽂혀 있다.
"진짜야?"
스스로 듣기에도 어색하게 물었을 때 임재희가 가방을 챙기더니 자리에서 일어섰다. 카페를 나왔을 때는 새벽 1시가 되어갈 무렵이었다. 임재희가 김명천의 팔짱을 끼더니 앞쪽으로 이끌었다.
"이 근처 여관은 싫어."
앞쪽에 시선을 준 채로 임재희는 분명하게 말했다."
"술집이나 나이트하고 따악 붙여져 있어서 들어가는 것들은 다 뻔하단 말야."
"젠장."
김명천이 이맛살을 찌푸렸다.
"교회나 절 옆에 있는 여관을 찾으란 말야?"
"여관은 싫어. 호텔로 가자."
"나 돈 없어."
"내가 낼게."
그랬다가 주춤 발을 멈춘 임재희가 김명천을 노려보았다.
"서울 와서 몇 번째야?"
"이 년 만에 네가 첨이야."
"그동안 뭘로 때웠어?"
"손으로."
"불쌍해라."
"넌?"
발을 떼면서 김명천이 묻자 임재희가 눈을 둥그렇게 떴다.
"뭐가?"
"넌 뭘로 때웠느냐구?"
"병신."
"어라?"
김명천이 눈을 부릅뜨자 임재희가 팔등을 꼬집었다.
"병신아, 남자하고 여자 생리 구조가 같은 줄 알아? 촌놈은 그런 것도 안 배우냐?"
"이게 정말."
그때 임재희가 지나가는 택시를 세우더니 김명천을 보았다.
"정말 생각 있어?"
"응."
김명천이 머리를 끄덕이자 임재희는 잠자코 택시에 올랐다.
"성북동 칼튼호텔요."
김명천이 옆자리에 앉았을 때 임재희가 운전사에게 말했다. 성북동 칼튼 호텔이면 특급 호텔로 주변 경관도 훌륭해서 외국 귀빈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임재희가 힐끗 김명천에게 시선을
주더니 다시 팔짱을 끼었다. 김명천은 심호흡을 했다. 오늘은 참으로 바쁜 날이었다.
택시가 칼튼호텔 현관 앞에 멈춰 섰을 때는 새벽 2시가 되어 있었다. 임재희는 2만 원 가깝게 나온 택시비까지 지불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아이 추워, 빨랑 들어가자."
김명천의 팔을 낀 임재희가 먼저 현관 안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로비로 들어선 김명천이 걸음을 멈췄으므로 임재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여기 호텔비 얼마야?"
"이십만 원쯤 돼."
목소리를 낮춘 임재희가 다시 팔을 끌었다.
"가, 바보야. 내가 낼게."
"싫어."
마침내 김명천이 머리를 저었다.
"돈이 비싼 것보다 이런 허세가 싫어."
이제 임재희는 눈만 치켜뜨고 김명천을 쏘아보았다. 김명천이 낮게 말했다.
"우리 다음에 다른 곳에 가자, 응?"
"너나 가라. 빙신아."
팔짱을 푼 임재희가 한걸음 떨어지더니 입술을 비틀며 웃었다.
"촌놈은 입에 넣어준 떡도 못 먹어."
김명천이 입을 열었을 때 어느새 임재희는 몸을 돌리더니 현관의 회전문을 밀며 밖으로 나갔다. 그러더니 대기하고 있던 모범택시에 올라 금방 시야에서 사라졌다. 심호흡을 한 김명천이 다시 밖으로 나왔을 때 방한복 차림의 도어맨이 다가와 섰다.
"택시 잡아 드릴까요?"
현관과 로비에 손님이 없었으므로 도어맨은 대형 유리창을 통해 김명천과 임재희의 모습을 보았을 것이었다. 그러나 도어맨은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아뇨, 됐습니다."
머리를 저었던 김명천은 도어맨이 몸을 돌리자 소리죽여 숨을 뱉았다. 이 시간에 버스나 지하철은 끊겨있을 것이었다. 김명천이 대림동의 윤수길 저택에 도착했을 때는 7시 반이었으니 합숙소에서는 잠을 세 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아침 3시 반에 합숙소에 도착한 데다가 6시 반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어, 왔나? 기다려라."
인터폰으로 대답한 윤수길은 20분쯤이나 더 지나서야 밖으로 나왔는데 얼굴이 꺼칠했다.
"여기 있다."
김명천에게 자동차 키를 던져준 윤수길이 대문 옆으로 비껴섰다. 차고에서 벤츠를 몰고 나온 김명천이 저택 앞에 멈춰 섰을 때 윤수길은 대문의 열쇠를 잠그는 중이었다. 대문을 잠근 윤수길이 차의 뒷좌석에 타더니 골목을 빠져나가 대로에 들어섰을 때에서야 입을 열었다.
"와이프 시골 보냈다. 미리 대피시켜 놓은 거야."
백미러에서 김명천의 시선과 마주쳤을 때 윤수길은 쓴웃음을 지었다.
"못 할 노릇이지. 지금 와이프가 임신 4개월째다."
김명천은 잠자코 앞만 보았고 윤수길의 말이 이어졌다.
"저 집도 월세야. 이번 달 말까지만 살면 된다."
어젯밤에 데려다 줄 때에도 사모님은 보이지 않았으니 요즘 윤수길은 혼자 살고 있는 것이다. 처음 윤수길을 대리운전 손님으로 만났을 때 그림 같은 저택에다 아름다운 부인을 보고는 꿈만 같은 생활을 한다고 부러워했었다. 김명천의 침묵이 마음에 걸렸는지 윤수길이 불쑥 물었다.
"왜, 무슨 생각을 하는 거냐?"
"아닙니다. 사장님."
김명천이 백미러를 보며 말했다.
"아무 생각 안 했습니다."

"네가 사장 운전사야?"
임원실로 불려 들어갔을 때 상석에 앉아 있던 40대쯤의 왜소한 사내가 물었다. 눈이 작은데다 입술이 튀어나와서 쥐 같은 형상이었지만 세련된 양복 차림에 구두는 반질거렸고 손에는 다이아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그가 A그룹장이며 전무이사인 최도석이다.
"예, 전무님. 김명천이라고 합니다."
김명천이 허리를 꺾고 절을 했을 때 옆쪽에 앉은 둥근 얼굴의 사내가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사장이 이번에는 준비를 단단히 하는구만, 하지만 주의할 것이 있어."
그리고는 사내의 얼굴이 순식간에 돌덩이처럼 굳어졌다. 일부러 그렇게 하라고 해도 어려운 동작이었다.
"마지막 미팅에는 꼭 참석해야 된다는 것이지, 그리고 사장까지 포함한 4명의 중역이 동시에 떠나는 거야."
"아니지."
지금까지 잠자코 있던 검은 피부의 사내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모두 여덟이야, 각 그룹별 비서 한 명씩에다 사장 운전사까지 말이야."
이들이 태양교역의 핵심 간부들이다. 둥근 얼굴이 B그룹장인 홍진복 상무이고 검은 피부가 C그룹장인 백시환 상무인 것이다. 그때 최도석이 김명천을 정색하고 보았다.
"내가 널 부른 건 경고를 해주려고 부른 거야. 그날 한 사람이라도 이탈하면 안 된다. 다 함께 살든지 죽든지 둘 중의 하나란 말이다."
김명천이 다시 비서실로 돌아왔을 때는 그로부터 30분쯤이 지난 후였다. 비서실에는 마침 서미나 혼자 남아있었는데 김명천을 보더니 반색했다.
"중역실 다녀오셨죠?"
김명천이 머리만 끄덕이자 서미나는 옆으로 의자를 당겨 앉았다.
"셋이 공갈쳤죠?"
"도대체."
마침내 김명천이 굳어진 얼굴로 서미나를 보았다.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거요? 동시에 같이 도망을 친다는 건 무슨 말이야? 내가 왜 도망을 쳐야되는 거요?"
"그날 부장급들이 할당액을 입금시키는 날이거든요."
주위를 둘러본 서미나가 목소리를 낮췄다.
"이번 연말 결산 때 3개 그룹의 부장들이 입금시킬 금액이 30억쯤 돼요. 그래서 회의실에 부장들이 모두 모이게 될 거예요."
"꼭 모여야 되는 거요?"
"부장들이 입금한 금액을 그 자리에서 다시 수당과 상금으로 나눠 분배해 줘야 되거든요. 30억 중에서 27, 8억쯤 다시 재분배가 되요."
"그럼 이쪽에서 2, 3억밖에 남지 않는군."
"그렇죠."
이제야 이해가 가느냐는 듯이 서미나가 눈웃음을 쳤다.
"그러니까 모두 그 자리에 있어야 되죠. 그리고는 수당과 상금을 나누기 직전에 모두 갖고 함께 도망가는 거죠."
"완전히 강도네."
"아니죠."
정색한 서미나가 머리를 저었다.
"부장들도 모두 강도나 사기꾼들이죠. 그들도 밑의 팀장이나 팀원들한테 사기를 쳤으니까요."
"다 도둑놈들이란 말인가?"
"그래서 아무도 경찰에 고발을 못 해요."
"내가 어쩌다가.."
길게 숨을 뱉은 김명천이 아연한 얼굴을 했을 때 서미나가 눈웃음을 쳤다.
"한번 겪고 나면 달라질걸요? 거기에다 돈뭉치를 한번 쥐게 되면 말예요."

그날 오후 4시가 되었을 때에서야 김명천은 시간을 내어 은행에 다녀왔다. 어머니한테 3백만 원을 보내드린 것이다. 전셋값 인상분 5백만 원은 채우지 못했지만 김명천의 기분은 오랜만에 목욕이나 한 것처럼 개운했다. 은행 앞에서 김명천은 어머니께 전화를 했다. 집에다 했더니 어머니가 전화를 받는 바람에 또 가슴이 철렁 내려앉기는 했다. 어머니가 집에 있는 경우는 몸이 아프거나 일이 없거나 둘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어머니, 어디 아파?"
김명천이 대뜸 물었을 때 어머니는 금방 밝은 목소리로 부정했다.
"아니야, 아픈 데 없어."
그렇다면 일감이 없는 것보다는 낫다 싶어서 김명천의 분당룸싸롱 목소리도 밝아졌다.
"어머니, 조금 전에 어머니 구좌로 3백 보냈어."
"아니, 얘가."
어머니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왜 보내? 난 괜찮다고 했지 않아? 생활비도 보내놓고 또 3백을 보내면 너는 어떻게 살라고?"
"이렇게 씩씩하게 잘 살고 있잖아?"
"명천아."
"곧 2백을 채워줄 테니까 걱정하지 말고 몸이나 챙겨, 아픈데 일 나가지 말고 말이야."
"명천아."
어머니의 목소리가 젖어 들고 있었으므로 김명천은 서둘렀다.
"사무실 앞이야. 나 들어가 봐야 돼. 어머니, 다시 연락할게."
그리고는 전화를 끊은 김명천의 어깨가 부풀려졌다가 내려갔다. 오늘은 통화 중에 어머니의 기침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것만 해도 기뻤다. 이제 수중에는 10여만 원 밖에 남지 않았지만 오히려 기분은 더 든든했다. 어머니한테 돈을 보내고 나면 그 기분 좋은 여운이 사흘은 갔다. 사흘 동안은 든든했고 지난 한 달을 보람있게 살아왔다는 자부심이 일어났다. 이제 3백을 보냈으니 후유증은 열흘은 갈 것이었다. 회사로 돌아온 김명천이 엘리베이터에 탔을 때 마침 안에는 태양교역의 영업사원이 가득 있었다.
"어때? 입금시켰어?"
김명천의 바로 앞에 서 있던 여자가 옆의 여자에게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응, 했어."
머리를 끄덕인 옆 여자의 목소리에 자랑스러움이 덮여 있었다.
"겨우 했어, 힘들어."
"난 못했어. 어떡해?"
"기운 내, 잘 될 거야."
바짝 붙어선 김명천이 듣고 있을 것임에도 여자들은 대화를 계속했다. 물론 그들은 김명천이 비서실 소속의 사장 운전사 겸 경호원이라는 것을 모른다.
"그럼 수당이 얼마나 돼?"
앞 여자가 묻자 옆 여자의 머리가 조금 눕혀졌다. 그러자 옆모습이 절반쯤 드러났다. 흰 피부에 섬세한 윤곽의 미인이다. 한쪽 귀에 작은 십자가가 달린 귀걸이를 달았는데 30대 초반이나 중반쯤으로 보였다.
"글세, 이번 분기에는 2백쯤, 될까?"
입금시키고 나면 수당이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여자의 수당은 부장들의 수당이 나오고 나서야 받게 될 것이다. 왜냐하면 부장이 자신의 몫으로 받은 수당에서 분배해 줘야 하기 때문이다. 즉 말단 세포는 팀원에게, 팀원은 팀 간부에게, 팀 간부는 팀장에게, 팀장은 차장에게, 차장은 부장에게 할당액을 입금시키면 부장은 각 그룹장 앞으로 입금시킨다. 물론 그룹장의 구좌는 모두 사장 윤수길이 장악하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서 다시 역으로 수당이 지급된다.

그날 밤 윤수길은 룸싸롱에서 새벽 1시가 되어서야 나왔다. 정확히 말하면 룸싸롱 ‘이화’에서 나온 것이 밤 11시였고 아가씨와 2차로 근처의 호텔에 들렀다가 나온 것이다. 그동안 김명천은 주차장에서 실컷 잠을 잘 수 있었다. 벤츠의 운전석을 눕히면 근사한 침대가 되는 것이다.
"너, 오늘 임원들 만났다며?"
차가 강변도로를 달려갈 때 윤수길이 생각난 듯 물었다. 대리운전을 한 경험에 의하면 오입을 하고 나오는 손님은 대개 술이 덜 취했는데 윤수길도 마찬가지였다. 백미러에 드러난 윤수길의 눈동자는 초점이 뚜렷했다.
"예, 사장님."
"뭐라고 하데?"
"도망치지 말라고 하던데요, 저까지 8명이 말입니다."
"개새끼들."
쓴웃음을 지은 윤수길이 다시 백미러를 보며 물었다.
"그래서 뭐라고 했어?"
"알았다고 했습니다."
"그날 하루만 재빠르게 움직이면 너한테 3천을 주마."
윤수길이 낮게 말했다.
"3천이면 큰돈이야. 더구나 넌 인적 사항이 아무것도 남지 않아서 널 찾지도 않을 거다."
"제가 무슨 일을 합니까?"
"그날 돈을 찾아오면 대기실에 임원들과 비서들이 계산을 한다고 모여 있다가 돈을 갖고 튀는 것이지, 이미 계획은 철저하게 세워놓았으니까 전날에 예행 연습만 하면 된다."
"그러면 저는."
"너는 돈을 나르고 운전하는 일이야. 현금과 소액권 헌수표로 바꿨지만 30억 가까운 금액이니까 5박스쯤 된다."
그리고는 윤수길이 빙긋 웃었다.
"한 15분 걸릴 거다. 15분 작업으로 3천을 먹다니 그런 일이 어디 있어? 대한민국 사람들 다 잡아놓고 시켜도 안 한다는 놈은 없을 거다."
거사일도 이제 일주일 앞으로 다가와 있는 것이다. 대림동의 빌라 앞에 차가 멈췄을 때 윤수길이 지갑에서 10만 원권 수표 한 장을 꺼내더니 내밀었다.
"차비해라."
"감사합니다. 사장님."
머리를 숙여 보인 김명천이 수표를 받고는 정색하고 윤수길을 보았다.
"사장님, 저, 내일부터 회사 그만두겠습니다."
그 순간 몸을 굳힌 윤수길이 눈을 가늘게 뜨고 김명천을 보았다. 대문 옆의 보안등에 비친 윤수길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만둔다구?"
"예, 하지만 비밀은 지키겠습니다."
"이유가 뭐나?"
갈라진 목소리로 윤수길이 묻자 김명천은 심호흡을 했다.
"저는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하고 싶습니다. 처음부터 샛길로 가지 않겠습니다."
"흥."
쓴웃음을 지은 윤수길이 어깨를 늘어뜨리면서 가늘게 숨을 뱉았다.
"내가 네 나이 때도 그런 생각을 했지. 그런데 오래 못 가더라."
"죄송합니다. 사장님. 믿고 일을 맡겨 주셨는데."
"괜찮아."
한 걸음 다가선 윤수길이 갑자기 생각이 난 듯 지갑을 꺼내더니 수표 한 장을 다시 내밀었다.
"자, 퇴직금이다. 받아라."
그리고는 윤수길이 김명천의 어깨를 손바닥으로 가볍게 쳤다.
"그래. 네 길로 가라. 나는 내 길로 갈 테니까."

"오늘은 회사 안 나가?"
주인아줌마는 아직 이름도 성도 모르고 있었지만 김명천에게 친절했다. 합숙소에서 생활하는 30여 명의 뜨내기 중에서 제일 착실하다고 대놓고 말해준 적도 있다. 그러나 가끔 과년한 딸이 찾아와 잠깐 들렀다 갔지만 사위 삼는다는 말은 안 했다.
"예, 오늘은 쉽니다."
아줌마한테 건성으로 대답한 김명천은 합숙소를 나와 골목 건너편의 간판도 없는 식당으로 들어섰다. 오전 9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어서 주방에 혼자 앉아 있던 아줌마가 담배를 비벼끄고 일어섰다.
"왠일이여? 아침밥 먹을라고?"
"예, 국밥 하나 주세요."
두 평도 안되는 식당의 냄새 나는 구석 자리에 앉아 김명천은 수첩을 꺼내 뒤적였다. 어젯밤 윤수길과 헤어져 집에 돌아온 후부터 계속해서 수첩을 뒤적이고 있었지만 뚜렷하게 전화할 곳은 없다. 오늘부터 다시 실업자 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어젯밤에 윤수길은 퇴직금이라면서 50만 원짜리 수표를 주었다. 그래서 수중에 현금이 70만 원가량 남아있는 데다 엊그제 어머니한테 전세금 인상분으로 3백까지 보낸 것이다. 직장은 잃었지만 아직 가슴은 든든했다. 순대국밥을 기다리면서 김명천은 옆쪽 식탁에 구겨진 채 놓여진 일간지를 집어 펼쳤다. 정치면이나 사회면은 보지도 않고 신문을 넘기던 김명천이 움직임을 멈췄다. 신문 하단부에 5단으로 큼직하게 나 있는 일성전자의 신입사원 채용공고를 본 것이다. 일성전자는 한국 제일의 기업이다. 아니, 세계 제일이다. 한국에서 자랑할 것이 있다면 일성전자의 제품이라고 말할 정도의 기업이다. 김명천은 먼저 나이 제한이 없다는 것부터 확인했다. 그리고 원서 마감이 바로 이틀 후로 닥쳐왔다는 것을 읽고는 마음이 조급해졌다. 지금까지 40군데 가깝게 입사원서를 냈지만 일성전자는 내지 않았다. 그것은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지방대 출신으로 일성전자에 입사한 전례도 없을 뿐만 아니라 담당 교수도 그렇게 말해 주었던 것이다. 일성전자는 서울의 일류 대학 중에서도 일급만 선발되었고 그것은 당연했다. 순대국밥이 앞에 놓여졌지만 김명천은 모집 요강을 읽느라 시선도 돌리지 않았다. 일성전자는 이번에 특별모집을 하는 것이다. 대졸 신입사원과 경력사원으로 모집 인원은 150명이었으니 아마 경쟁률은 연초의 정기 모집보다도 높을 것이었다. 정기 모집의 경쟁률은 100대 1 가깝게 되었으므로 고시에 붙는 것 같다는 언론 보도를 읽은 적이 있다. 그날 김명천은 하루종일 원서 준비를 해서 오후 3시가 되었을 때 일성전자 본사에 송부시켰다. 그리고는 기대하지 않기로 작정을 했다. 기대를 했다가 번번이 좌절되고 나면 나중에는 의욕마저 떨어졌기 때문이다. 임재희의 전화가 왔을 때는 오후 6시경이었다.
"지금, 어디야?"
불쑥 그렇게 물었던 임재희가 김명천이 영등포에 있다고 하자 그럼 역 앞에서 한 시간 후에 만나자는 것이었다. 외출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김명천은 입은 옷 그대로 합숙소를 나왔다. 임재희는 파커에 두 손을 찌르고 역 앞에 우두커니 서 있었는데 추위 때문인지 얼굴이 창백했다.
"왠 일이야? 이 시간에 집에 있었어?"
김명천이 다가서자 임재희가 물었다.
"응, 오늘은 쉬는 날이야."
"그래? 그럼 나 저녁 사주라."
다가선 임재희가 김명천의 팔을 끼었다.
"배고파. 오늘 점심부터 안 먹었어."
임재희의 머리에서 옅은 향내가 맡아졌다.

영등포 시장 뒷길은 이제 김명천에게 제 동네처럼 익숙해져 있어서 싸고 맛있는 집은 다 알았다. 김명천이 임재희를 데리고 들어간 식당은 낙지볶음이 유명한 곳이었다. 손님이 바글거렸지만 그들은 구석 자리를 겨우 잡아 소주에 낙지볶음을 시켰다.
"어디 아프냐?"
임재희의 앞에 젓가락을 놓아주며 김명천이 물었다.
"안색이 안 좋아."
‘신경 꺼."
젓가락을 든 임재희가 반찬으로 나온 김치를 깨작거렸다.
"나 회사 그만뒀어."
소주가 먼저 놓여졌으므로 김명천이 잔에 술을 채우며 말했다.
"인간적으로는 좋은 사람들이었지만 같이 일은 못 하겠어. 그래서."
"잘했어."
임재희가 정색하고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서 이 시간에 합숙소에 있었구만."
"합숙소라니?"
놀란 김명천이 묻자 임재희는 쓴웃음을 짓고 시선을 내렸다.
"알고 있었어."
"그래?"
한 모금 소주를 삼킨 김명천이 턱으로 임재희의 잔을 가리켰다.
"마셔."
"그럼 앞으로 뭐 할 거야?"
"새벽에 인력시장에 당분간 나갈 거야."
"겨울에 공사하는 데가 있을까?"
"이삿짐센터 일도 가끔 나와."
머리를 끄덕인 임재희가 잔을 들더니 입술만 축이고는 내려놓았다. 낙지볶음이 놓여졌으므로 식탁은 열기와 냄새로 뒤덮여서 분위기가 조금 바뀌어졌다. 임재희가 매운 낙지볶음을 씹더니 손바닥으로 입 주위를 부채질했다.
"아유, 매워."
"땀 한번 쭉 빼면서 먹으면 진짜 뭘 먹은 것 같아."
"너무 매워."
하면서도 임재희는 다시 낙지를 집었다. 얼굴이 차츰 밝아지기 시작하면서 술기운과 매운 낙지까지 곁들여져서 임재희의 모습이 원상으로 돌아갔다.
"사장이 이번 일이 끝나면 3천을 준다고 하더구만."
한 모금 소주를 삼킨 김명천이 붉어진 얼굴로 웃었다.
"딱 15분만 일을 하면 3천이 굴러들어오는 거야. 거기에다 난 얼굴도 알려지지 않았고 기록도 없어. 그냥 사라지면 끝나는 일이었지."
임재희가 눈만 깜박이고 있었으므로 김명천은 말을 이었다.
"사장을 데려다주고 나서 회사 그만두겠다고 했더니 퇴직금이라면서 50을 주더라. 좋은 사람이었어. 그 사람도."
"어째 들어간 회사마다 다 그 모양이야?"
술잔을 든 임재희가 술잔 사이로 김명천을 노려보았다.
"다 사기꾼들 아냐?"
"네 외삼촌 소식 있어?"
불쑥 김명천이 묻자 임재희는 술잔을 기울여 한 모금에 소주를 삼켰다. 임재희의 외삼촌이 바로 돈 떼어먹고 도망간 대리운전 회사 사장이다.
"없어. 그깐 자식."
"요즘 안 좋은 일 있어?"
내친김에 다시 물었을 때 임재희가 정색하고 김명천을 보았다.
"나, 내일부터 룸사롱 나가."
숨을 멈춘 김명천의 얼굴을 바라본 임재희가 피식 웃었다.
"돈 벌면 놀러 와라."
"이게."
했지만 김명천은 어깨를 부풀리고 심호흡을 했다.

"너 카드빚 있어?"
속에서는 오만가지 생각이 엉켜 있었지만 말로 뱉아진 것은 그렇게 되었다. 그러자 임재희가 놀랍게도 머리를 끄덕이는 것이었다.
"그래. 어쩌다 보니까 3천 5백쯤 되었어. 그래서 어제 마담한테 선금으로 2천 받아서 갚았으니까 1천 5백 남았다."
"죽겠구만."
머리를 돌린 김명천이 벽을 향하고 말했다.
"신문이나 TV에서 보던 일들이 내 옆에서도 터지는구만. 그래, 카드로 긁고 명품 사 모은 거냐?"
"그랬다. 어쩔래?"
눈은 치켜떴지만, 임재희의 목소리는 가벼웠다. 김명천의 시선을 받은 임재희가 다시 술잔을 들었다.
"내가 벌린 일은 내가 해결할 테니까 신경 꺼. 물어보길래 숨길 것도 없고 해서 대답한 것뿐이니까."
"시발, 그래도 몸 팔아서 목돈 받을 수 있으니 나보다 낫구만."
"시끄러, 짜식아."
젓가락을 내려놓은 임재희가 눈을 부릅떴다. 임재희의 시선을 맞받았던 김명천은 곧 검은 눈동자에 덮인 물기를 보았다. 그러자 그것을 의식한 임재희가 시선을 내렸고 그 서슬에 눈물이 두어 방울 흘러 떨어졌다.
"좋아."
어깨를 부풀렸던 김명천이 호흡을 가누고 말했다.
"내가 남의 제사상에 콩 놔라 두부 놔라 할 필요는 없지. 하지만 너보다는 내가 몇 살 위인데다 너한테 신세 진 것도 있으니까 내 말을 해야겠다."
김명천이 임재희의 콧잔등을 노려보았다.
"몸을 내놓을 만큼 갈 데까지 간 거냐? 더 이상 방법이 없었어?"
"없었어."
임재희가 다 식은 낙지볶음을 보면서 대답했다.
"그것밖에 없었어."
"그럼 도망가, 도망갈 데 없으면 내가 있는 합숙소에라도 숨어."
주위를 둘러본 김명천이 목소리를 낮췄다.
"합숙소는 안전해. 끝방에 40살쯤 되는 부부가 사는데 부도내고 도망 나온 사람들이야. 돈만 내면 아무 말도 않고 조사 나오지도 않아."
"흥, 저는 거저 준다는 3천도 마다하고 도망쳐 나오고는."
쓴웃음을 지은 임재희가 의자에 등을 붙이더니 눈을 가늘게 뜨고 김명천을 보았다.
"오늘은 아무 여관이나 가자. 나 피곤하고 졸려."
"아니, 그러면."
"어서 날 데리고 나가."
그리고는 임재희가 몸을 일으켰으므로 김명천은 술잔을 자빠뜨리면서 서둘러 일어났다. 밖으로 나왔을 때 영등포 뒷거리에는 눈발이 흩날리고 있었다.
"야아, 눈 온다."
김명천의 팔을 두 팔로 감아 안은 임재희가 소리쳤다.
"영등포 밤거리에 눈이 온다."
"시끄러."
"오늘은 술집 옆에 붙어있는 여관에라도 갈게. 너하고 둘이만 있다면."
"교외로 가자."
김명천이 말하자 임재희가 퍼뜩 머리를 들었다. 그러자 김명천이 쑥스러운 표정을 짓고 말을 이었다.
"아무 데나, 수원도 좋고 천안도 좋고, 아직 전철도 끊기지 않았을 테니까."
"그럼 지금 가."
임재희가 팔을 끌었다. 바로 옆이 영등포 역인 것이다.

전철로 오산에서 내렸을 때는 눈발이 굵어져 있었다. 바람도 없는 밤이어서 눈은 그냥 똑바로 떨어져 내렸는데 거리는 이미 흰 눈에 쌓여졌다.
"눈 좀 봐."
역을 나왔을 때 임재희가 일부러 인도 바깥쪽의 사람 발자국이 찍히지 않는 곳만 골라 밟으면서 소리쳤다.
"우리 사람 없는 데로 가자."
"안 추워?"
"안 추워."
"그럼 바닷가로 가자."
"정말?"
임재희가 김명천의 팔을 두 팔로 감았다. 피곤하고 졸립다던 눈이 반짝이고 있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발안행 버스를 타고 다시 서해 바다가 보이는 허름한 민박집에 찾아 들었을 때는 밤 10시 반이 되어 있었다. 그동안 임재희는 흰 눈길을 지치도록 걸었지만 방을 잡아놓고 나서도 또 나가자고 했다. 이번에는 바닷가로 가자는 것이었다. 아직도 눈은 그치지 않아서 내일 아침에는 찻길이 막힐 것이라고 민박집 주인은 걱정했다. 바닷가로 나왔을 때는 바닷바람에 눈이 날려 금방 얼굴이 젖었다. 짙게 어둠이 덮여 있어서 사방이 흰 눈에 덮여 있을 것이지만 보이지 않았다. 김명천이 임재희의 손을 잡았다.
"저기 바위 밑으로 가자."
얼굴을 숙인 임재희가 잠자코 김명천에 끌려 왔다. 바위 밑에는 눈도 쌓이지 않았고 바람도 닿지 않았다. 다만 모래가 젖어 있어서 김명천은 근처의 바위를 들어다가 자리를 만들었다. 바다를 등지고 바위에 기대어 앉는 자리였다.
"여기 잠깐 있어. 민박집에서 뭘 좀 사 올 테니까."
임재희가 앉았을 때 김명천이 말했다.
"빨리 와."
김명천의 파카를 머리 위에서부터 걸친 임재희가 낮게 말했다. 이곳까지 오면서 임재희는 거의 입을 열지 않았다. 다만 김명천의 팔에 매달리듯 붙어 따라왔을 뿐이다. 김명천이 가게를 겸하고 있는 민박집에서 소주와 마른안주를 사 들고 왔을 때 임재희는 바위 밑에서 꼼짝 하지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은 민박집에서 200m쯤이나 떨어진 외딴곳이었고 주위에는 인적도 없는 곳이다.
"무서웠니?"
김명천이 헐떡이며 묻자 임재희는 술병이 든 봉투를 받아들며 웃었다.
"아니, 행복했어."
"왜?"
"자기 기다리는 것이."
그들은 나란히 앉아 잔에 소주를 따라 쥐었다. 파도 소리가 점점 크게 울려왔고 가끔은 눈발이 한두 점씩 안쪽으로 떨어졌다. 이제 어둠이 익숙해져서 서로의 윤곽이 뚜렷하게 드러났다. 임재희가 먼저 소주를 한 모금에 삼키더니 앞쪽을 본채 말했다.
"아버지 빚 때문에 그래."
김명천의 시선이 볼에 닿았지만 임재희는 그대로 말을 이었다.
"아버지 사업이 망해서 나하고 남동생이 엄마랑 셋이서 살아. 아버지는 도망 다니는 중이고."
그때 김명천이 팔을 들어 임재희의 어깨를 안았다. 임재희가 김명천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는 낮게 숨을 뱉았다.
"2000 받아서 아버지한테 1,000만 원 드렸어. 그리고 어머니가 빌린 돈 갚으라고 600 드렸고, 나머지 400은 동생 등록금 줬고."
그리고는 임재희가 머리를 돌려 김명천을 보았다.
"기뻤어. 아버지, 어머니, 동생이 좋아하는 걸 보고, 난 보험회사에서 수당 탔다고 했거든."
임재희는 지금까지 한 번도 집안 사정을 말한 적이 없어서 김명천은 식구가 몇인지도 모르고 있었다. 가만있으면 파도소리는 더 크게 들렸다. 김명천은 잠자코 종이컵에 소주를 따라 임재희에게 내밀었다.
"그 방법밖에 없었느냐고 물었잖어?"
잔을 받은 임재희가 김명천을 보았다. 서로 어깨를 붙이고 앉아 있어서 눈동자가 바로 20㎝쯤 앞에 떠 있다.
"그래서 난 그 방법밖에 없었다고 대답했지만."
임재희가 술을 한 모금에 마시더니 진저리를 쳤다.
"솔직히 말하면 날 받아준 그 마담이 고마웠어. 그 방법도 누구나 다 선택할 수 있는 것이 아니거든."
"미안해."
술을 삼킨 김명천이 길게 숨을 뱉았다.
"내가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
"아냐."
피식 웃은 임재희가 웃음 띤 얼굴로 김명천을 보았다.
"내가 룸사롱 나간다고 해서 머가 달라지니? 왜 그렇게 심란한 얼굴이야?"
"아니, 내가 뭘."
"나 키스해줘."
임재희가 턱을 치켜든 모습으로 얼굴을 내밀었는데 눈은 그대로 떴다.
"안 해?"
임재희의 맑고 높은 목소리가 파도 소리를 누르고 울렸다. 김명천은 먼저 임재희의 허리를 두 손으로 당겨 안았다. 그러자 임재희가 안겨 오면서 얼굴이 바로 부딪칠 듯 다가왔다. 그때 임재희가 눈을 감았으므로 김명천은 마음 놓고 입술을 붙였다. 임재희의 입술에서 금방 마신 술맛이 났다. 그러나 임재희는 이를 맞물고 있었으므로 김명천은 입술만 빨았다. 그때 입재희가 두 손을 뻗쳐 김명천의 목을 감아 안았다.
"나, 좋아?"
김명천이 입술을 떼었을 때 임재희가 더운 숨을 목덜미에 품으면서 물었다.
"응."
다시 입술을 빨려던 김명천이 뭔가 부족한 느낌이 들었던지 덧붙였다.
"널 좋아했어."
"언제부터?"
"회사 나갔을 때부터."
"그럼 왜 한 번도 그런 눈치를 보이지 않았는데?"
"내가 연애할 처지가 안되어서."
"빙신."
이번에는 임재희가 먼저 김명천의 입술에 입술을 붙였다. 그리고는 악물었던 이를 풀더니 혀를 조금 김명천의 입안으로 내밀어 주었다. 김명천은 머리 위로 피가 몰리는 느낌이 들었지만 행복했다. 그때 임재희가 입술을 떼면서 말했다.
"여기서 해줘."
김명천은 그 순간 무슨 말인가 알아듣지 못했다가 임재희가 스스로 바지 지퍼를 내리는 것을 보고서야 깨달았다. 서둘러 파커를 젖은 모래 위에 펼쳐 놓았을 때 임재희는 말 잘 듣는 색시처럼 다소곳이 누웠다. 그러나 바지만 벗은 채 윗도리는 스웨터에 코트까지 그대로 걸치고 있다. 김명천은 서둘러 바지만 벗고는 임재희의 몸을 안았다. 임재희가 낮게 신음을 뱉았지만 두 팔로 김명천의 어깨를 더 세게 안아주었다.
"아, 별이 떴으면."
임재희가 신음과 함께 그렇게 말했을 때 김명천은 이를 악물었다. 그때서야 파도 소리가 들렸고 귓가를 스치는 임재희의 가쁜 숨결도 느껴졌다.
"나 자기 좋아해."
그때 임재희가 몸을 더 붙이더니 말했다.

민박집 방바닥은 따끈해서 추위에 얼었던 온몸이 나른한 피로감과 함께 녹아내리는 느낌이었다. 밤 12시가 되어가고 있어서 안채의 불은 꺼졌고 주위는 조용했다. 김명천과 임재희는 이제 민박집의 두툼한 이불을 덮고 누워 있었는데 서로 빈틈없이 안았다. 방의 불도 꺼놓아서 방은 물론이고 창밖도 검다. 가만있으면 파도 소리가 들렸는데 가끔 그것이 자동차 소음 같게도 느껴졌다.
"나 말이야."
김명천의 가슴에 볼을 붙인 임재희가 소근소근 말했다.
"나 대학 2학년 중퇴한 거 알아? 모르지?"
물론 알 리가 없는 김명천은 잠자코 임재희를 안고만 있었다. 임재희가 말을 분당룸싸롱 이었다.
"대학 때 남자를 만났어. 동아리 선배였는데 서로 첫눈에 반했지. 우린 사랑했어."
임재희가 목을 조금 빼고 김명천을 올려다보았다.
"사랑했단 말야. 들었어?"
"응."
"내 첫사랑이야."
"응."
"내가 처음으로 몸을 주었고."
"응."
그러자 임재희가 머리를 뒤로 젖히더니 초점을 잡고 김명천을 보았다.
"난 후회하지 않아."
"잘했다."
김명천이 임재희의 허리를 당겨 안았다. 브래지어와 팬티 차림인 임재희의 몸이 다시 바짝 붙여졌고 머리에서 샴푸 냄새가 맡아졌다.
"그래, 그렇게 해."
이번에는 김명천이 혼잣소리처럼 말했다.
"간직할 것이 있으면 오래 갖고 있어."
김명천이 이제는 눈만 크게 뜨고 있는 임재희의 귀에 대고 말을 이었다.
"버리지 말고, 다 소중하게 지켜."
"빙신."
"네 첫사랑이었다는 놈도."
"쪼다."
"난 널 좋아해."
"웃겨."
"네가 뭘 하든 네 옆에 있어 줄게."
"미쳤어."
"난 배신하지 않아."
이번에는 임재희가 대꾸하지 않았으므로 김명천이 머리를 숙여 아래쪽을 보았다. 임재희는 자신의 가슴에 한쪽 볼을 착 붙인 채 눈을 감고 있었다. 어두워서 그 이상은 보이지 않았는데 곧 맨 가슴에 더운물이 길게 흐르면서 아래쪽으로 갈 때는 차거워졌다. 눈물이다. 김명천이 머리를 숙여 임재희의 이마에 입술을 붙였다가 떼었다.
"내가 널 지켜줄게."
김명천이 낮게 말했다.
"살아있는 한 희망이 있는 거다. 절대로 좌절하면 안 돼."
그리고는 김명천이 길게 숨을 뱉았다.
"우리는 아직 젊어."
"안아줘."
불쑥 임재희가 말했으므로 김명천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때 임재희가 손을 뻗어 김명천의 팬티를 아래로 끌어 내렸다.
"다시 안아줘. 아까는 추워서 어떻게 했는지도 모르겠어."
그리고는 임재희가 누운 채 브래지어와 팬티를 끌어 내려 순식간에 알몸이 되었다. 임재희가 김명천을 몸 위로 끌어 올리면서 말했다.
"난 죽을 때까지 오늘 밤을 잊지 않을 꺼야."
그리고는 한 몸이 되었을 때 신음처럼 말했다.
"사랑해, 자기야."

"김명천씨 맞습니까?"
정중하면서도 사무적인 목소리가 수화구를 울렸을 때 김명천은 젓가락을 내려놓았다. 오전 10시 반이었다. 식대를 줄이려고 아침 겸 점심으로 합숙소 앞 순대국집에서 막 식사를 하려던 참이었다.
"예, 접니다."
"여긴 일성전자 총무부인데요."
그 순간 김명천은 숨을 죽였다. 일성전자에 입사원서는 송부했지만 잊고 있었던 것이다. 원서 마감 후에 신문에는 경쟁률이 250대 1 가깝게 된다고 보도되었기 때문이다. 역사상 최고의 경쟁률이라고도 했다. 수화구에서 말이 이어졌다.
"내일 오후 3시까지 수원 본사 연구회관 빌딩 5층 514호실로 오셔서 면접 심사를 받으십시오. 원서 접수증은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 알겠습니다."
긴장한 김명천이 상체까지 반듯이 세운 채 대답하고는 서둘러 펜을 꺼내어 면접 장소를 적었다.
"왜? 무슨 일 있어?"
식당 아줌마가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으나 김명천은 아직 긴장이 풀리지 않아서 대답도 하지 못했다. 일성전자에서 면접 심사 통보가 오리라고는 전혀 상상도 하지 못했던 것이다. 모집이 있길래 눈 딱 감고 원서를 보냈을 뿐으로 기대는 하지 않았다. 일성전자의 기준으로 보면 수만 명 응시자 중에서 서류 심사등급으로 본다면 상중하에서 중하 정도의 수준일 것이었다.
"국 식어. 밥 안 먹을 거야?"
다시 아줌마가 물었으므로 김명천은 수저를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아줌마를 보았다.
"아주머니, 이거 저녁때 와서 먹으면 안 될까요? 지금 일이 있어서."
"어, 그래."
심성이 고운 아줌마가 머리를 끄덕이더니 다가와 순대국 그릇을 집었다. 다행히 아직 밥은 국그릇에 섞지 않았다.
"그럼 저녁때 와."
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밥맛이 달아났기 때문이다. 서둘러 합숙소로 돌아온 김명천은 먼저 양복부터 살펴보았다. 태양교역 운전사 경호원으로 채용되었을 때 받은 양복은 아직 멀쩡했지만, 다림질을 해야 될 것 같았다. 양복에다 셔츠까지 들고 합숙소를 나가는데 주인아줌마가 불렀다.
"김씨, 다음 달에 그 방 계속해서 쓰려면 하루 5,000원씩 내야 돼. 알겠지?"
"예, 아주머니."
"김씨니까 특별히 봐주는 거야."
"알겠습니다."
합숙소를 나온 김명천의 가슴이 다시 무거워졌다. 베니아 판으로 칸막이가 된 방은 옆방의 숨소리까지 다 들렸다. 여자를 받지 않아서 그래도 이상한 광경은 없었지만 지금까지 방 한 칸에 두 명이 각각 3,000원씩 내고 숙박해왔다가 혼자 있게 되자 5,000원으로 인상한다는 것이다. 합숙소를 15년째 운영한다는 아줌마는 강남에 몇십억짜리 저택을 갖고 있는 부자라는 소문이 났지만 매정했다. 아무리 오랜 단골이라도 외상 손님은 받지 않았고 시계라도 잡아야 잠을 재웠다. 그래야 서울에서는 밥 굶지 않고 살아간다는 것이다. 세탁소에다 양복과 셔츠, 넥타이까지 다림질을 부탁한 김명천은 골목 안을 서성거렸다. 오늘도 눈이 올 것 같이 흐린 날씨였는데 바람이 세었다. 임재희는 지금쯤 잠을 자고 있을 것이었다. 오늘이 룸사롱 `하진'에 나간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고 눈 내린 날 발안의 바닷가 민박집에서 밤을 같이 보낸 지 닷새째가 된다. 그 후로는 만나지 못한 것이다.

일성전자 본사는 수원 교외의 전자 단지에 위치해 있었는데 거대한 규모였다. 그런데 100만 평의 부지가 좁아서 일성전자는 기흥에 다시 100만 평 규모의 제3공장을 건립 중이었다.
김명천이 수원 본사의 연구회관 빌딩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2시였다. 면접 한 시간 전인데도 빌딩 앞마당과 1층 대기실에는 수천 명의 응시자가 웅성거리고 있었는데 오늘이 면접 3일째였다. 경쟁률이 250대 1인 것이다. 눈앞에서 우글대는 건장하고 머리 좋은 놈들 250명을 쳐 없애야 가능성이 생긴다는 말이었다. 2시 10분에는 1층 로비에서 얼쩡대며 주고받는 말을 듣다가 2시 반경이 되었을 때 김명천은 3층의 복도까지 올라왔다. 그동안 오가는 말을 종합해서 정리하면 이번에 모집하는 150명은 기구 확장에 필요한 인원이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서울대를 비롯한 일류 사립대 3곳 출신이 가장 유력했다. 하지만 솔직히 그들의 실력이 뛰어나기도 했다. 2시 40분에 김명천은 5층 대기실에서 면접번호를 받고 주의사항을 들었다. 김명천의 면접번호는 8247번이었는데 5명이 1개 조를 이루어 면접을 보는 방식이었다. 면접관은 5명으로 시간은 10분이었으니 1인당 배분된 시간은 2분 정도였다. 그러나 가끔 튀는 놈이 나타나면 말 몇 마디 정도만 하고 나오는 경우도 있다. 그것은 튀는 놈이 잘난 체하느라고 혼자 떠들어서 남의 시간을 빼앗기 때문인데 그런 놈이 합격 되었는지는 모른다. 8247번 명찰을 달고 514호실 앞에 서 있는 김명천에게 사내 하나가 다가왔다. 8250번이다. 8246번부터 같은 조였으니 같이 면접을 보게 될 사내였다.
"반갑습니다. 같이 면접 보게 되었네요."
사내가 붙임성있게 먼저 인사를 했다. 번호 밑에 이름이 박인태라고 적혀져 있었다. 김명천도 얼굴을 펴고 웃어 보였다.
"잘해 보십시다."
"이번 면접은 5배수를 뽑는다는 소문이 있습니다. 그리고나서 다시 추린다는 건데."
박인태가 긴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목소리를 낮췄다.
"3차 면접까지 있다는 겁니다."
"그래요?"
"다방면으로 적성 파악을 하겠다는 의도랍니다."
어디서 들었는지 알 수 없지만 김명천은 처음 듣는 소문이었다. 그러나 희망이 더 일어났다. 5배수라면 정원보다 5배를 더 뽑아서 다시 추린다는 말이다. 이력서에 일성전자의 1차 면접에 합격되었다고 쓸 수야 없겠지만 우선 당장은 가능성이 더 많아진 것이 나은 것이다.
"제 164조, 준비하세요."
스피커에서 부르는 소리에 그들은 서둘러 대기실로 들어섰다. 10분 전이었다. 대기실에는 이미 8246번부터 나머지 세 명이 기다리고 있었는데 모두 단정한 양복 차림에 용모도 준수했다. 김명천은 외모로 말할 것 같으면 다섯 명 중 가장 출중할 것이었다. 1m 85의 신장에 체중은 82kg으로 군살도 없는 체격이다. 거기에다 태양교역의 오수영이 골라준 고급 양복 차림인 것이다. 그러나 대기실에 앉은 다섯은 긴장한 채 서로 이야기를 나누지도 않았다. 8250번 박인태도 앞쪽만 바라보았다. 이윽고 벨이 울리더니 앞쪽 문이 열리고 사내 하나가 나왔다.
"자, 164로, 들어오세요."
심호흡을 한 김명천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지금까지 셀 수도 없이 면접을 보았지만 오늘이 제일 센 상대였다. 마치 무대의 상대를 향해 링에 오르는 기분이었다.
방으로 들어선 김명천은 앞쪽 벽을 등지고 나란히 앉아 있는 5명의 면접관을 보았다. 말이 본 것이지 이쪽은 얼어서 윤곽만 보았을 뿐이다. 하지만 저쪽은 들쥐의 허점을 노리는 뱀처럼 이쪽의 일거수일투족을 냉정하게 살피고 있을 것이었다. 이런 경우에는 김명천의 방식이 있다. 아예 저쪽 시선을 무시해 버리는 것인데 그렇다고 대놓고 그렇게 했다가는 감점이다. 시선을 상대방의 가슴께에 두고는 태연하게 행동해야 된다.
"거기들 앉아요."
맨 왼쪽 사내가 그렇게 말했으므로 5명이 번호 순서대로 앞에 나란히 놓여진 의자에 앉았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먼저 번호대로 자기 소개를 한 다음에 면접관이 목표로 찍은 상대에게 질문을 퍼부을 것이었다. 물론 질문 내용은 모두 다르다. 그떄였다. 오른쪽에 앉은 사내가 불쑥 입을 열었다. 시선이 김명천의 옆인 8248번에게 향해져 있었다.
"만일 대리운전을 해주고 가다가 차에 흠집을 내었다고 합시다. 물론 술에 취한 차 주인은 모릅니다.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예. 저는 차 주인께 정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8248이 즉각 대답하더니 덧붙였다.
"그렇게 해야만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때 중앙에 앉은 가장 나이 든 사내가 김명천을 보았다.
"8247번은 어떻게 할 겁니까?"
그러자 김명천은 먼저 심호흡부터 했다.
"저는 말 안 합니다."
그리고는 그도 덧붙였다.
"저는 대리운전을 해봐서 압니다. 그렇게 해도 득 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득 될 것이 없다니?"
궁금한 듯 사내가 눈을 크게 뜨고 물었고 다른 면접관의 시선도 모두 김명천에게 모여졌다. 김명천의 가슴이 내려앉았지만 내친 김이었다. 대리운전을 물어본 것이 운수소관인 것이다.
"예, 술 취한 손님을 깨워 상황을 설명해준다면 대리운전 회사에서는 당장에 목을 자를 것입니다. 미친놈이라고 욕까지 얻어먹습니다. 거기에다 손님한테 얻어맞을지도 모릅니다."
김명천이 쏟아붓듯 말했을 때 사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대리운전을 해 보았소?"
"예, 지난달까지 했습니다."
"지금은 뭘 하고 계시는데?"
"예, 인력시장에 나갑니다."
아직 나가지는 않았지만 김명천은 다부지게 그렇게 대답했다. 오늘은 이상하게 자신이 튀는 놈이 되어 버렸지만 본의는 아니다. 그때 중앙의 사내가 다시 물었다. 나이가 많은데다 중앙에 앉아서 제일 선임자로 보였다.
"요즘 인력시장에 일은 있습니까? 그리고 일당은 얼마나 받는가요?"
"성남 인력시장에서 공사장 잡부나 이삿짐센터 일은 있습니다. 일당이 공사장 잡부는 5만 원 정도지만 이삿짐센터는 고되긴 해도 8만 원에서 10만 원까지 받습니다."
사내가 머리를 끄덕이며 입을 다물었으므로 그때서야 다른 면접관이 이것저것 물었지만 김명천에게는 더 이상 질문이 오지 않았다. 면접을 끝내고 나왓을 때 다른 사내들은 싸우다 떼어놓은 것처럼 뒤도 안 보고 떠나갔지만 8250번 박인태는 김명천에게 다가왔다.
"이건 내 예감인데."
박인태가 가는 눈을 더 가늘게 뜨며 웃었다.
"김형은 이번 면접에 붙으실 것 같습니다. 축하합니다."
그리고는 박인태가 손을 들어 보이더니 몸을 돌렸다.

룸사롱 ‘하진’은 테헤란로의 상스호텔 뒤쪽 골목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첫눈에 보아도 특급이었다. 우선 3층 건물 전체가 룸사롱인 데다가 외관이 눈에 띄지도 않고 은근했다. 현관의 불을 밝히고는 있었지만 ‘하진&rsquo간판은 아주 조그맣게 붙여져서 그것이 오히려 오만하게 보여졌다. 김명천은 114에다 하진의 전화번호를 묻고는 위치를 알아낸 것이다. 밤 12시가 되었을 때 하진 옆쪽의 주차장에서 고급 차들이 하나씩 빠져나와 현관 앞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외제 차였고 기사가 딸려있다. 김명천은 주차장 건너편의 세탁소 앞에 서 있었는데 하진의 현관이 대각선으로 보이는 위치였다. 이번에는 벤츠 두 대가 주차장에서 나와 현관 앞에 멈춰서자 기다리고 있던 손님 네 명과 아가씨 네 명이 나눠탔다.
마담의 배웅을 받으며 차가 떠났을 때 김명천은 파커 주머니에 넣어둔 소주병을 꺼내 두 모금을 삼켰다. 소주는 반병쯤 비워졌고 체온에 녹아 따뜻했다. 미지근한 술맛에 이맛살을 찌푸린 김명천이 입맛을 다셨을 때 또 손님들이 현관으로 나왔다. 이번에는 세 명이다. 역시 마담에다 지배인, 아가씨 세 명이 따라나와 있었지만 임재희는 보이지 않았다.
‘봐서 뭐 한다고 이러는 거냐?'
술병에 찬 기운을 입히려고 땅바닥에 내려놓은 김명천이 다시 혼잣소리를 했다.
‘손님하고 이차 나가는 꼴 봐서 뭐 하겠다는 거야? 아예 정 떼려고?’
세탁소 옆쪽은 오목한데다 어두웠으므로 서서 하진을 훔쳐보기에는 안성맞춤이었지만 추웠다. 두 손을 파커 주머니에 찌르고 어깨를 움추린 김명천은 이를 부딪치며 떨었다.
"아니지."
김명천이 제 말을 부정했다.

"이차 나가면 어때? 그런다고 정떨어진다면 그런 놈은 좃 떼야 돼. 그런 좃은 필요 없어."
땅바닥에 내려놓은 술병을 집어 든 김명천이 벌컥이며 세 모금을 삼켰다. 술은 차가워져서 제대로 술맛이 났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이냐? 쪽팔리게."
그때였다. 현관으로 아가씨 두 명이 나오더니 곧장 이쪽으로 걸어왔다. 세탁소로 오는 것이 아니라 이쪽 길로 걸어오는 것이다. 술병을 쥔 채 눈을 크게 떴던 김명천은 아가씨 두 명 중의 하나가 임재희라는 것을 알고는 몸을 굳혔다. 그들과의 거리는 이제 10미터 밖에 안되었다. 쥐고 있던 술병에 시선이 닿는 순간 놀란 김명천은 술병을 옆으로 내려놓았다. 그러자 여자들과의 거리는 5미터 정도가 되었는데 이쪽은 어두워서 아직 알아보지 못하고 있다. 김명천은 침을 삼켰다. 그리고는 이제 2미터쯤 거리로 다가온 임재희에게 말했다.
"재희야."
"엄마야!"
대경실색을 한 임재희가 자지러졌고 같이 오던 아가씨까지 덩달아서 놀라 펄쩍 뛰었다.
"나야."
김명천이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약간 빛이 깔린 세탁소 앞으로 나가 섰다.
"아니, 너."
임재희가 두 눈을 치켜떴다. 아랫입술까지 물었다가 푼 임재희가 한 걸음 다가섰다.
"너, 여기서 뭐 해?"
임재희의 목소리가 거리를 울렸다.
"뭐하냐구?"
"그냥."
"그냥?"
그때 옆에 서 있던 아가씨가 임재희의 팔을 잡아당겼다. 얼굴에 웃음기가 조금 떠올라있다.
"얘, 불쌍하다. 같이 국수나 먹자."

근처에는 포장마차가 많았는데 그들이 들어선 곳은 골목 안쪽의 주차장에 설치된 대형 포장마차였다. 테이블 하나를 차지하고 국수와 꼼장어, 거기에다 소주를 일사불란하게 시킨 것은 임재희의 친구 하유미였다. 그동안 임재희와 김명천은 눈만 껌벅이고 앉아 있었을 뿐이다. 더 자세하게 표현한다면 임재희는 여러 차례 눈을 흘겼고 김명천은 시선을 받지 않고서 두리번거리기만 했던 것이다. 술과 안주가 재빨리 날라져 왔을 때 하유미가 웃음 띤 얼굴로 김명천을 보았다.
"잔 받으세요."
인사는 포장차에 들어서기 직전에 했다. 김명천이 술잔을 쥐었을 때 하유미가 소주를 따르면서 물었다.
"재희가 이차 나가는 걸 보면 어쩔 작정이었어요?"
"뭐, 그냥."
한 모금에 술을 삼킨 김명천이 그때서야 재희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았다.
"그냥 돌아갔겠죠, 뭐."
"그리구여?"
"뭐가 말입니까?"
"그리구 어떻게 될 것 같았어요?"
"그런 건 생각 안 했습니다."
김명천이 시선을 돌려 탁자를 내려다보았다.
"그냥 보고 싶어서 간 겁니다."
그때 임재희가 제 앞에 놓인 술잔을 쥐더니 한 모금 삼켰다.
"정말 구질구질하게 놀지 마."
술잔을 내려놓은 임재희가 말을 이었다.
"궁상떨지 말라구."
"알았어."
김명천이 선선하게 머리를 끄덕였다.
"앞으로는 안 그럴게."
"나한테 연락도 하지 마."
"알았어."
국수가 날라져 왔으므로 셋은 젓가락을 들었다. 그러나 열심히 먹는 사람은 김명천뿐이었다. 임재희와 하유미는 젓가락으로 깔작이면서 김명천만 힐끗거렸다. 이윽고 김명천이 국물까지 깨끗하게 비웠을 때 하유미가 제 국수를 반 이상 덜어주었다.
"더 드세요, 저녁도 안 드셨나 봐."
김명천이 잠자코 그 국수까지 다 먹었을 때 임재희가 말했다.
"돼지 같아."
"얘는."
하면서 하유미가 눈을 흘겼으나 임재희가 다시 김명천을 쏘아보았다.
"나, 오늘은 이차 손님을 못 받았지만 앞으로는 계속 이차 나갈 거야. 그리고 가능하면 스폰서도 하나 만들려고 해."
김명천이 눈만 껌벅였을 때 임재희의 말이 이어졌다.
"나가는 김에 돈 벌어야겠어. 그러니까 제발 걸리적거리지 말아줘. 알았지?"
"알았다니까."
이제는 제 손으로 잔에 소주를 채운 김명천이 조금 차분해진 시선으로 임재희를 보았다.
"누가 뭐래니? 스폰서를 세 명 잡아도 상관없고 하룻밤에 이차 두 번 나가도 상관없어. 하지만,"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은 김명천이 어금니를 물었다가 풀었다.
"너, 혼자 있을 때, 그러니까 어디 몸이 아파서 집에 있을 때라든지 또, 갑자기 주민등록표가 있어야 할 때, 그런 때 내가 네 옆에서 심부름을,"
"시끄러 짜식아."
임재희의 목소리가 컸으므로 옆좌석의 여자들이 이쪽을 보았다. 눈을 부릅뜬 임재희가 잇사이로 말했다.
"날 제발 혼자 내버려 둬. 그것이 나를 돕는 일이란 말이야."
임재희의 두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포장마차를 나왔을 때는 새벽 두 시가 되어갈 무렵이었다. 계산은 김명천이 지갑을 꺼냈다가 임재희한테 밀려서 자빠질 뻔하고는 못 했다. 임재희가 계산을 한 것이다. 골목에서 나와 대로변에 서자 임재희가 한 손을 들더니 살랑살랑 흔들었다. 날씨보다도 차가운 표정이었다.
"잘 가."
"안녕히 가세요."
옆에서 인사하는 하유미의 표정이 오히려 더 감정이 띄어져 있었다.
"건강하게 지내."
두어 걸음 다가선 김명천이 파커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르고는 임재희를 보았다.
"술 많이 마시지 말고."
"알았어."
임재희가 입술을 비틀면서 시선을 내렸을 때 김명천이 뱉듯이 말했다.
"언제든지 내가 필요하면 불러."
"그런 일 없을 거야."
"네가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고마워."
머리를 끄덕인 김명천이 옆에 서 있는 하유미에게 눈인사를 하고는 몸을 돌렸다. 날씨가 더 추워져 있었다. 파커 깃에 머리를 넣고 움추렸지만 얼굴은 금방 돌처럼 굳어졌고 눈앞이 흐렸다. 인도에는 행인의 통행이 뚝 그쳐져 있었다. 갑자기 추워진 이런 날씨에 동사자가 생기는 것이다. 소주 한 병쯤 더 마시고 바람을 피한다면서 빌딩의 구석에 웅크리고 있다가는 영락없이 아침에 동사자가 될 것이었다. 먹고 살기에 바쁘다 보면 잔 감정에 치우치는 여유가 적어지는 법이다. 바꿔 말하면 배가 부를 때에나 연애의 감정이 풍성해지는 것이다. 당장 춥고 배가 고프면 따뜻한 곳 찾아가 무언가를 먹는 것이 정상이다. 한참을 걷던 김명천은 임재희에게 일성전자의 면접을 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그때서야 떠올렸다.
면접 합격자 발표는 바로 오늘이었다. 오전 10시가 되었을 때 김명천은 합숙소 앞에서 전화를 받았다. 마악 아침 겸 점심을 먹고 나온 참이었다.
"김명천씨 맞습니까?"
사내가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을 때 김명천의 가슴이 뛰었다.
"예, 그렇습니다."
"수험번호 8247번,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전화한 사내는 상대방의 기뻐하는 분위기를 즐기는 것이 분명했다. 조금 뜸을 들인 사내가 말을 이었다.
"2차 면접이 있습니다. 운동복 차림에 간단한 세면도구를 지참하시고 내일 아침 6시까지 일성전자 본사 연구회관 광장에 오셔야 합니다. 늦으시면 안 됩니다."
"예, 알겠습니다."
"2박 3일의 면접입니다. 그렇게 알고 계시도록."
"예, 알겠습니다."
그때 전화가 끊겼지만 김명천은 심호홉을 하고 나서야 조심스럽게 핸드폰의 덮개를 닫았다. 1차 면접에 합격 한 것이다. 면접 때 만난 8250번의 말을 들으면 3차 면접까지 있다는 모양이었으나 이것만 해도 사법고시 1차에 붙은 것만큼 감개가 무량했다.
서둘러 합숙소로 들어온 김명천은 옷을 차려입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운동복을 준비하려는 것이다. 객지 생활을 햇수로 3년 동안 해오면서 운동복을 입고 운동을 한 적은 한 번도 없다. 지금까지 한일 대부분이 육체노동이어서 운동복이 필요 없었기 때문이다. 영등포 시장에서 운동복과 운동화, 거기에다 야구모자까지 곁들여서 사 오면서 김명천은 문득 임재희의 얼굴을 떠올렸다가 지웠다. 아무한테라도 자랑하고 싶은 충동이 일어났기 분당룸싸롱 때문이다.

다음 날 아침 5시 30분에 김명천은 일성전자 연구회관 광장에 도착했다. 아직도 어둠이 덮여진 과장에는 벌써 수백 명의 인파로 덮여 있었는데 모두 생기 띤 표정들이었다. 1차 면접에 통과되었다는 자부심이 발산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6시 정각이 되었을 때 갑자기 연구회관의 건물 정면에 글씨가 떴다. 어둠 속에서 거대한 건물을 안내판으로 만든 것은 과연 일성전자 다운 발상이었다.
안내판에는 각 팀별로 구분이 된 것을 띄워 주었는데 8247번 김명천의 글씨도 글자 하나가 1m가 넘어서 몇km 밖에서도 보았을 것이다. 김명천은 제32팀으로 집결 장소는 수련원 건물의 체육관이었으며 시간은 6시 10분이다. 수련원은 연구회관 뒤쪽의 산속에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모두 달려야만 했다. 거리가 31m 가깝게 되었기 때문이다. 운동복 차림으로 어두운 새벽길을 달리면서 김명천의 가슴은 부풀었다. 주위에서 함께 달리는 합격자들의 표정도 밝았다. 그러나 차츰 긴장감이 덮여지는지 조금 전보다는 말소리가 줄어들었다. 그들이 수련원에 도착했을 때 이미 체육관 안에는 불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각 팀원은 20명씩이었고 50팀까지 있었으니 1차 합격자는 1천 명인 셈이었다. 신문에 난 모집 인원이 150명이었으므로 다시 경쟁률이 7대1 정도가 되었다. 32번 팀의 팻말 뒤쪽으로 늘어앉은 20명의 팀원 중 아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번호도 들쑥날쑥해서 김명천의 옆에는 2412번이 앉았고 뒤에 앉은 여자의 가슴에는 4572번 명찰이 붙여져 있었다.
"자, 여러분 주목."
앞쪽 연단에 오른 사내가 한마디 하자 체육관 안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일성전자 마크가 붙여진 체육복 차림의 사내는 말을 이었다.
"여러분은 이곳 수련원에서 2박 3일을 보내게 됩니다. 각 팀별 활동을 중심으로 체크가 될 테니까 유의하시고 책상에 놓인 일과표대로 행동하셔야 됩니다."
김명천은 책상에 놓여진 일과표를 보았다. 아침부터 밤까지 일정이 빈틈없이 짜여져 있었는데 팀별 경쟁이 대부분이다. 옆에 앉은 2412번이 중얼거렸다.
"이건 적자생존의 전쟁이군."
흰 얼굴에 금테 안경을 낀 수재 스타일의 사내였다. 그때 연단에 선 사내가 다시 말했다.
"그럼 7시까지 각 팀은 지정된 방에 들어가 팀장과 부팀장을 선출해 주십시오, 선출 방식은 자유입니다. 자, 해산."
그리고는 사내가 몸을 돌렸으므로 체육관 안은 곧 소란스러워졌다. 누구를 부르는 소리도 들렸고, 책상이 넘어지는 소음도 일어났다. 일과표에는 방의 약도까지 그려져 있었으므로 자리에서 일어선 김명천이 주위의 팀원을 둘러보았다.
"2층 218호실인데."
그러나 시선만 스치고 지날 뿐 말을 받아주는 사람은 없다. 벌써부터 경쟁이 시작된 것이다. 이층 계단을 올라 복도 왼쪽의 218호실로 들어선 김명천은 넓은 방에 둥그렇게 책상이 배열되어있는 것을 보았다. 책상은 모두 20개였다.
"준비를 철저히 해놓았군."
방에 들어선 팀원 하나가 말하면서 아까 김명천이 했던 것처럼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이번에도 말을 받아주는 팀원이 없었다. 그때 김명천이 머리를 끄덕이며 사내를 보았다.
"그렇군요, 책상에 종이하고 펜까지 놓인 걸 보니까 팀장 선거에 사용하라는 것 같습니다."
"그것참."
사내가 쓴웃음을 지었을 때 책상 20개는 다 찼다. 팀원이 모두 모인 것이다.
지금부터 시작이다. 팀장과 부팀장 2명을 선출하는 것부터 점수가 매겨질 것이 분명하다는 사실은 모두가 안다. 그리고 선출된 팀장과 부팀장이 면접 점수에 가산점을 받게 될 것도 분명했다. 그때 누군가가 말했다. 멀어서 이름과 번호는 보이지 않았다.
"얼른 선거를 합시다. 종이에 팀장과 부팀장을 적어내면 되겠구만."
"그렇다면."
하고 나선 사내가 수재형 인상인 2412번이었다. 김명천과 두 사람 건너편에 앉아서 이름이 보였다. 박종일이다.
"각자 소개를 하고 팀장이 되면 뭘 어떻게 하겠다는 소견을 밝히도록 하죠. 시간은 1분씩으로 하고 차점자가 부팀장이 되도록 합시다."
유창한 말이었고 내용도 빈틈이 없다.
"그럽시다."
하고 두어 명이 찬성을 했으므로 박종일이 아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내가 돈 안 받고 진행을 보겠습니다. 발언 순서는 이쪽부터 하시고."
박종일이 자신의 옆자리에 앉은 사내를 가리켰다.
"시간은 내가 재겠습니다."
김명천은 자신의 순서가 오려면 시간이 있었으므로 팀원을 둘러볼 여유를 갖게 되었다. 20명 중 여자는 3명이었다. 다른 팀도 여자는 그 정도의 비율이었는데 이 팀의 여자는 모두 미인들이었다. 그리고 남자들의 나이는 들쑥날쑥했지만 대학을 갓 졸업한 것 같은 사내도 서너 명은 되었다.
"그만."
하고 박종일이 말을 길게 잇는 사내의 소개를 중지시켰다. 그리고는 다음 순서를 지명했다.
"하세요."
김명천은 박종일이 팀장은커녕 부팀장에 당선될 가능성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일에 박종일 자신이 그것을 모르고 있다면 군대를 가지 않았거나 사회생활에 문제가 있는 인물일 것이었다. 어디서나 모난 돌은 찍힌다. 더욱이 지금은 팀원 20명 모두가 경쟁 상대인 상황이다. 잘난 놈은 물론이고 잘날 가능성이 있는 놈, 잘난 척하는 놈까지 눈에 띄기만 하면 없애야만 내가 사는 것이다. 그리고 투표가 그것을 없애는 가장 편리한 방법이 아닌가? 그때 4527번의 소개가 시작되었다.
"전 4527번 서나미입니다. 국제대 영문과를 졸업했고 지금까지 섹스는 다섯 번 했습니다. 남자는 두 명이었어요. 하지만 재미는 별로였습니다. 이상이에요."
그러자 남자들의 절반은 소리 내어 웃었고 대여섯 명은 박수를 쳤으며 서너 명은 뭐라고 격려까지 해주었다. 김명천은 얼떨결에 박수를 쳐 준 축에 끼었지만 조금 황당했다. 그리고는 서나미를 다시 보았다. 시치미를 뚝 떼고 앉아 있던 서나미가 시선을 돌리다가 김명천과 맞추 쳤는데 곧 비껴 지나갔다. 김명천은 큰 변고가 없는 한 서나미가 팀장이 되리라고 생각했다. 서나미의 파격적인 소개 흉내를 낸답시고 다음 사내가 야한 소개를 했다가 곧 썰렁한 반응을 받고는 다시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그리고는 곧 김명천의 순서가 되었다.
"저는 8247번 김명천입니다. 익산대 경영학과를 나왔습니다. 잘 부탁합니다."
김명천이 책을 읽듯이 그렇게 말하고는 허리를 90도로 꺾고 절을 했다. 짧은 소개였다. 서울대 출신 한 명이 김명천과 비슷하게 짧은 소개를 했을 뿐 나머지는 모두 길었다. 박종일의 소개를 끝으로 20명은 곧 투표에 들어갔다. 팀장 한 명의 이름이나 번호를 써내는 것이다. 그중 차점자는 부팀장이 된다.

투표가 끝났을 때 박종일은 20개의 쪽지를 모아 입회인 2명을 제가 선정하더니 곧 개표를 했다. 그가 쪽지에 적힌 이름을 하나씩 부르고 입회인 한 명이 그것을 받아 적는 방법이었다.
"김명천."
제일 먼저 자신의 이름이 불렸으므로 김명천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속으로는 놀라지 않았다. 19명은 지방대 출신인 자신을 경쟁 상대로 가장 만만하게 보았다는 증거일 것이었다. 소개도 가장 허술하고 어리숙하게 했다. 비슷하게 한 서울대 졸업생은 오만하게 보였을 것이었다.
"서나미."
다음에는 예상했던 대로 섹스를 5번 했다는 서나미의 표가 나왔다.
"김명천."
다시 이름이 불리워졌을 때 김명천은 팀장에 당선되리라는 예감이 들었다. 그리고 5분쯤 지났을 때 김명천은 20표 중 7표를 얻어 팀장이 되었다. 부팀장은 6표를 얻은 서나미였다. 박종일은 3표를 얻었는데 그중 한 표는 저 자신이 써냈을 가능성이 컸다. 김명천은 서나미를 써냈으므로 7명의 지지를 받은 셈이다. 나머지 4표는 4명이 1표씩 나눠 가졌다.
"그럼 김명천씨가 팀장이 되었고 서나미씨가 부팀장이 되었습니다."
박종일이 돈만 받고 생색 안 난 사회자로 선언했을 때 김명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찍어주셔서 고맙습니다."
김명천이 정색하고 19명을 둘러보았다.
"우리 팀 안에서도 경쟁이 있을 것이고 어떤 방법이든 평가가 있을 겁니다. 하지만."
눈을 가늘게 뜬 김명천이 말을 이었다.
"이번 면접은 팀별 경쟁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니 먼저 우리 팀이 단결해서 경쟁을 이겨 나갑시다. 그러면 팀 안의 탈락자가 분명히 줄어들 것입니다."
"그렇지."
하고 서너 명이 머리를 끄덕였고 분위기가 차츰 일체감이 띄워지는 것이 분명하게 드러났다. 김명천이 주먹을 쥐고 흔들었다.
"합심해서 헤쳐나갑시다. 다른 팀도 곧 그것만이 살길이라고 알게 되겠지만 우리가 먼저 깨닫고 움직입시다. 현재로서는 그 길만이 최선일 것입니다. "
"옳소."
이제는 칠팔 명이 호응했고 모두 공감하는 얼굴 표정들이다. 박종일도 머리를 끄덕이고 있다. 일과표에 보면 일정이 시간별로 적혀져는 있었지만 구체적인 내용까지 설명되지 않았다. 그때 스피커에서 사내의 목소리가 들렸다.
"각 팀의 팀장과 부팀장은 1층 회의실로 5분 내에 집합할 것."
벌써 7시 5분 전이 되어 있었던 것이다. 서둘러 방을 나서는 김명천의 뒤를 서나미가 따라나섰다.
"연설, 감동적이었어요."
복도를 나란히 걸으면서 서나미가 앞쪽을 본채 말했다. 시치미를 뚝 뗀 얼굴이었고 그 순간 김명천은 자신에게 온 7표 중에서 서나미의 표는 포함되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서나미는 저 자신을 찍었거나 다른 엉뚱한 놈을 찍었다. 박종일도 찍지 않았다.
"난 서나미씨 찍었습니다."
김명천이 말했을 때 서나미가 희미하게 눈웃음을 쳤다.
"박수 쳐 주시데요. 하지만 조금 황당한 표정이시던데."
"자신의 약점이나 비밀을 까 보이면서 접근하는 용기가 훌륭했지요."
"그것이 쇼일 수도 있어요."
그들은 나란히 회의실로 들어섰다.
회의실에는 50개 팀의 팀장과 부팀장이 모였으니 모두 100명이다. 이번 채용인원이 150명이었으므로 김명천은 50명만 추가하면 되겠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자, 주목."
이번에 단상에 선 사내는 처음 지시사항을 말해준 사내보다 상관으로 보였다. 나이도 30대 후반쯤이었고 인상도 중후했다.
"각 팀의 팀장과 부팀장은 앞에 놓인 용지에 번호와 성명을 적어 제출할 것, 그리고 앞으로는 팀에 대한 지시사항은 팀장을 통해 전달된다."
사내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100명의 팀장과 부팀장은 기침 소리도 내지 않았다.
"팀장과 부팀장은 함께 팀을 지휘하고 책임을 진다. 팀 내부에 문제가 발생하면 팀장이 교체된다. 따라서 팀장과 부팀장은 팀의 조화나 단결을 저해하는 팀원을 제명할 수가 있다. 책상 위에 있는 용지를 갖고 가도록."
사내가 가차 없이 말을 이었다.
"팀원에 대한 제명 사유를 적어 제출하면 심사위에서 판단할 것이다. 그리고,"
시선을 든 사내가 입술만으로 웃었다.
"팀원들도 팀장에 대한 거부권이 있다는 걸 기억하고 있도록, 지금 각 방의 팀원들에게 방송으로 설명이 가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팀원도 팀장, 부팀장을 제명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최종 결정권은 심사위에 있다. 사내가 정색한 얼굴로 그들을 둘러보았다.
"지금부터 생존게임을 시작한다, 각 팀은 과제를 받으라."
그러자 심사위 소속의 직원 하나가 나서더니 박스에서 밀봉된 봉투를 꺼내면서 호명했다.
"제1팀."
과제가 적혀진 봉투인 것이다. 김명천의 옆에 앉아 있던 서나미가 입술만을 달싹이며 말했다.
"흥, 서바이벌 게임? 무슨 TV프로 같지 않나요?"
김명천이 대답하지 않자 서나미가 힐끗 시선을 주었다.
"다른 명칭도 있을 텐데."
그때 사내의 말이 이어졌다.
"각 팀장은 팀별 과제가 적힌 봉투를 팀원들과 함께 펴본 후에 즉시 실행할 것, 이상이다."
"밥은 안 줍니까?"
뒤쪽에서 누군가가 커다랗게 물었고 몇 명이 와르르 웃었다. 여럿이 모이면 꼭 한두 명씩은 나타나는 유형이었다. 그러자 따라 웃은 사내가 부드럽게 말했다.
"아침 식사는 7시 반에 지하 식당에서 먹게 된다. 그리고 언제나 식당은 열려있다. 일성전자에서 밥을 굶기겠는가?"
32번이 호명되었으므로 김명천은 앞으로 나가 밀봉된 봉투를 받아들고 나왔다. 마지막 50번이 봉투를 받았을 때 사내가 회의실을 둘러보며 말했다.
"여러분, 살아남아서 같이 근무하게 되기를 진심으로 기대하겠다. 자, 그럼 건투를 빈다."
그리고는 회의가 끝났으므로 김명천과 서나미는 복도로 나왔다.
"우리 둘의 호흡이 먼저 맞아야 돼요."
사람들에 휩쓸려 복도를 걸으면서 서나미가 옆에 선 김명천에게 말했다.
"팀원들이 우리를 타킷으로 삼을지도 몰라요."
김명천이 머리를 끄덕이며 손에 쥔 봉투를 흔들어 보았다.
"과제 내용이 궁금한데요."
"작년에는 이렇게 하지 않았다던데."
이맛살을 찌푸린 서나미가 머리까지 갸웃거렸다.
"서바이벌 게임이라니. 나, 참."

방으로 돌아온 김명천과 서나미에게 18명의 시선이 모아졌다. 7시 25분이었다. 연단으로 나간 김명천이 봉투를 치켜들고 웃었다.
"여기에 우리 과제가 들어 있습니다. 심사위원은 우리가 서바이벌 게임을 하고 있다는군요, 따라서 우리들의 생존이 걸린 과제일 것입니다."
그리고 김명천이 서나미와 함께 밀봉된 봉투를 열었다. 그러자 한 장의 종이가 들어 있었다. 빼곡하게 글자가 적혀진 종이였다. 김명천이 종이를 들고 읽었다.
"오늘의 과제입니다."
옆에 서 있던 서나미의 얼굴이 굳어졌다. 먼저 눈으로 읽은 것이다. 김명천이 긴장한 팀원을 향해 과제를 읽었다.
"오늘의 일과 동안 31팀의 행동을 관찰하여 일과 후에 보고서를 작성, 팀장에게 제출할 것."
심호흡을 한 김명천이 계속해서 읽었다.
"각 팀원은 31팀의 같은 번호를 대상으로 관찰한다. 즉 5번은 31팀의 5번이 대상이며 팀장 또한 31팀의 팀장이 대상이다."
종이에서 시선을 뗀 김명천이 팀원들의 가슴에 붙여둔 새 명찰을 보았다. 이제 팀원의 가슴에는 32-로 시작되는 일련번호가 부착되어있는 것이다. 김명천의 번호는 32-1이며 서나미는 32-3이다.
김명천이 다시 과제를 읽었다.
"31팀이 눈치채는 경우에는 평점이 무효가 될 것이므로 주의할 것, 이상."
그리고는 김명천이 서류를 내려놓았을 때 7번이 나섰다. 이름은 이수열이다.
"팀장, 그렇다면 스파이 짓을 하라는 것인데 31팀도 우리를 관찰, 보고하라는 과제를 받지 않았을까요?"
"그럴 리는 없지요."
9번이 나섰다.
"서로 마주 보고 관찰시키지는 않을 겁니다. 아마 멀리 떨어진 팀을 시켰을 겁니다. 만일에 그랬다면 말이지요."
"어쨌든."
손을 들어 발언을 중지시킨 김명천이 굳어진 얼굴로 팀원을 둘러보았다.
"일단 우리 팀의 상대는 31팀입니다. 단결해서 과제를 풀어나갑시다. 물론 눈치채지 못하게 해야겠지요."
"나아 참."
13번이 대놓고 투덜거렸다.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벌써부터 스파이 훈련을 시키고 말이야."
그리고는 힐끗 시선을 들어 연단에 선 김명천과 서나미를 훑어보았다.
"지금 내 불평도 팀장의 노트에 기록이 되겠지요?"
13번 이름은 강석규였다. 쓴웃음을 지은 김명천이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다.
"아침 식사 시간입니다. 일과표대로 식사를 마치고는 9시까지 대회의장에서 강의를 받습니다."
지하 식당은 예비사원 1,000명을 수용하고도 남았다. 식사는 뷔페식이었고 메뉴가 특급 호텔 뷔페보다도 다양했으므로 모두 만족한 표정들이었다. 식판에 음식을 담아 든 김명천이 식탁에 앉았을 때 서나미가 옆으로 다가왔다. 김명천의 시선을 받은 서나미가 이번에도 앞쪽을 보면서 말했다.
"팀장 옆에 있어야 되잖아요? 그래서 그런 것이니까 오해는 하지 마시도록."
"근처에 같은 팀이 있는가 살펴봐요."
젓가락으로 김밥을 집어 씹으면서 김명천이 자연스럽게 말했다.
"같은 팀의 1, 2번이 근처에 있다면 그건 우리 관찰자가 되겠지."
"그렇군요."
머리를 끄덕인 서나미가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쪽도 번호대로 대상이 정해졌겠지요."
대회의실에서 좌석 배열은 팀별로 되어 있어서 31팀은 바로 옆쪽이었다. 그래서 31-1번인 팀장 박상호는 김명천의 오른쪽 옆자리에 앉게 되어서 일거수일투족을 볼 수 있는 것은 물론이고 냄새까지 맡을 수 있었다.
오전 일과는 일성전자의 발전상황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서 소감을 적어내는 것이었으므로 정신을 집중해야만 했다. 틈틈이 훔쳐본 박상호는 그야말로 범생이었다. 한눈도 한번 팔지 않았으며 자세도 반듯했다.
소감을 적어낸 후에 점심시간까지는 삼십 분가량 여유가 있었으므로 대회의실과 복도에는 소음으로 덮여졌다. 그러나 모두 긴장하고 있어서 행동이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다른 팀의 과제가 무엇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들 또한 약점을 찾아내는 작업임은 분명했다. 김명천이 머리를 돌려 박상호를 보았다. 박상호는 일과표를 읽고 있는 중이었다.
"아직도 경쟁률이 7대 1입니다. 이 중에서 850명이 빠져나가야 된단 말이죠."
김명천이 말하자 박상호가 빙긋 웃었다.
"회사에서는 결국 조직에 필요한 인간을 선택하겠지요?"
박상호가 낮게 물었지만 김명천은 분명하게 들었다. 주위를 둘러본 김명천이 따라 웃었다.
"당연한 일 아닙니까? 회사원이 되면 개인적인 행동은 할 수 없게 됩니다."
"개성은 무시당하고 말이죠?"
"조화하고 적응해야 되겠지요."
그렇게 말한 김명천이 쓴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난 내세울 만한 개성도 없습니다."
"난 박상호입니다."
박상호가 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했다.
"김명천입니다."
손을 잡은 김명천이 박상호의 흰 얼굴을 보았다. 손바닥은 여자처럼 부드러웠고 얼굴도 볕에 타지 않았다. 곱게 개성을 내세우며 자란 스타일이다.
"박형은 어느 파트 지망입니까?"
"난 영업입니다."
"나도 그렇습니다."
박상호의 시선을 받은 김명천이 다시 희미하게 웃었다. 영업 지망끼리 경쟁을 시켜 탈락시키려는 의도인 것이다. 그때 박상호가 눈을 좁혀 뜨고 김명천에게 물었다.
"김형은 어떻게 해서 팀장이 되었습니까?"
"만만하게 보였기 때문이죠."
박상호의 시선을 받은 김명천이 정색했다.
"지방대 출신에다 소개말도 제일 짧았거든요."
"흐흐흐"
소리 내어 웃는 박상호가 엄지를 구부려 자신의 얼굴을 가리켰다.
"난 어떻게 팀장이 된 줄 압니까? 시시하니까 가위바위보로 팀장을 뽑자고 제안을 했다 무시당했는데 정작 투표를 하니까 내가 6표나 나왔더란 말입니다. 삐딱하게 보인 것이 점수를 딴 것이죠."
"일성전자는 몇 번째 응시한 겁니까?"
김명천이 묻자 박상호는 서슴없이 대답했다.
"난 미국에서 지난달에 귀국해서 입사원서 낸 곳은 두 곳뿐입니다. 서울제철하고 일성전자하고."
박상호가 정색하고 말을 이었다.
"서울제철은 입사 통보까지 받았지만 아무래도 이곳이 적성에 더 맞을 것 같아서요."
"아아."
머리를 끄덕인 김명천이 웃음 띤 얼굴로 박상호를 보았다.
"대단하시네요, 두 곳에 원서를 내고 두 곳 다 합격을 하시다니."
"이런, 내가 조금 잘난 척했나요?"
입맛을 다신 박상호가 뒷머리를 긁었다.
"악의는 없습니다. 잘 봐주십시오."

오후에는 팀별 주제를 정해놓고 토론을 시키는 시간이 되었는데 팀장은 사회를 맡았다. 그러나 각 팀에는 기록 요원이라고 불리는 심사위 직원이 하나씩 배정되어서 모두의 발언을 녹음했다. 김명천도 예외가 아니었다. 32팀에 배정된 주제는 청소년 윤락행위에 대한 근절 대책이었으므로 다소 엉뚱했지만 활발한 토론이 이루어졌다. 내용이 녹음되었다가 평가 받게 될 것이었으니 모두 정성을 쏟은 것이다. 저녁 식사 전의 휴식 시간에 복도 계단 옆에 서 있던 김명천의 옆으로 팀원이 없었기 때문인지 박상호가 거침없이 물었다.
"내가 김형의 관찰대상이 되겠군요. 그렇지요?"
김명천이 눈만 크게 떠 보였을 때 박상호는 빙긋 웃었다.
"32팀에서 우리 팀으로 정보가 다 새어 나왔습니다."
"그럼 31팀의 과제는 뭡니까?"
"그건 밝힐 수가 없네요."
김명천의 시선을 받은 박상호가 머리까지 저었다.
"미안합니다. 팀의 비밀이어서요."
"그렇다면 우리 팀의 비밀만 새어 나갔다는 말인데."
"배신자가 있는 겁니다."
그리고는 박상호가 정색하고 김명천을 보았다.
"배신자를 알려 드릴 수는 있는데."
"조건이 있습니까?"
"글쎄요."
쓴웃음을 지은 박상호가 힐끗 김명천을 보았다.
"김형이 본 내 처신은 어떻습니까?"
"최상급이었지요."
비슷하게 웃은 김명천이 박상호의 시선을 받았다.
"객관적으로 봐도 그렇습니다."
"13번입니다."
박상호가 정색하고 말했다.
"13번이 우리 팀 17번한테 말했습니다. 13번과 17번은 서로 아는 사이라고 하더군요."
"고맙습니다."
"어떻게 하실 겁니까? 제명시키시려면 나한테 들었다는 말은 하지 않으셔야 할 텐데."
"제명은 무슨."
쓴웃음을 지은 김명천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냥 놔둘랍니다."
"어쨌든 잘 부탁합시다."
한쪽 눈을 감아 보인 박상호가 사라지자 김명천은 길게 숨을 뱉았다. 13번 강석규는 스파이 훈련을 시킨다고 대놓고 불평을 했던 사내였다. 식사 시간이 아직 남아있었으므로 방으로 돌아온 김명천에게 서나미가 다가왔다. 서나미는 지금까지 열심히 보고서를 쓴 모양으로 아직도 손에는 종이를 들고 있다.
"밤에는 팀별 등산이라고 하는데요."
서나미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김명천을 보았다.
"운동장에 등산화하고 장비를 실은 트럭이 와 있대요."
"그럼 하는 거죠. 뭐."
"하지만."
한 걸음 다가선 서나미가 김명천을 똑바로 보았다.
"시간을 재어서 하위 10개 팀은 등산이 끝나면 퇴소시킨다고 해요."
"일성전자 입사하려면 먼저 등산 연습부터 해야겠군."
했지만 김명천의 표정도 어두워졌다. 팀별 등산이니 한 사람이라도 낙오하면 불합격이 될 것이었다. 혼자만 산을 분당룸싸롱 잘 탄다고 되는 일이 아니었다.
팀원 8번이 표현한 대로 좆나게 뺑뺑이를 돌려 탈락자를 만드는 형국이 되었다. 저녁 식사 후에 각 팀은 운동장에 모여 등산 장비 일체를 지급받았다. 모두 일성그룹 제품으로 김명천으로서는 지금까지 입고 신어보지도 못한 고급품이다. 장비를 다 갖췄을 때 연단에 선 심사위원이 말했다.
"각 팀장은 본부 사무실에서 등산 지시서를 받아 가도록. 이상."
서둘러 본부 사무실로 향하는 김명천의 옆으로 다가선 사내가 낮게 말했다.
"팀장, 우리 팀을 누가 관찰하고 있는가 궁금하지 않소?"
놀랍게도 13번 강석규였다. 김명천이 강석규의 가는 눈을 쏘아 보았다.
"안다고 해서 별 도움이 되지도 못할 것 같은데."
"그래도 모르고 있는 것보다는 낫지. 33팀이요."
"바로 옆쪽 팀이군."
"31팀은 아니지."
강석규가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서로 옆쪽을 관찰하도록 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재주가 좋으신데."
"31팀 17번하고 33팀 6번이 고등학교 동창이요. 난 31팀 17번하고 대학 동기고."
김명천의 시선을 받은 강석규가 이번에는 활짝 웃었다.
"누가 그랬던가. 한국에서는 세 사람만 거치면 인연이 닿는 사람을 만난다고 했지 않습니까? 여기서도 예외가 아니지요."
"그런가요?"
"내가 31팀 17번한테 정보를 주었어요. 그러자 17번이 그 대가로 33팀이 우리 관찰자라는 걸 알려준 것이지."
"그렇다고 우리한테 어떤 도움이 되겠소? 직접 타협을 하지 않는 한 말이요."
본부 사무실 앞 복도에 멈춰선 김명천이 정색하고 강석규를 보았다. 사무실 앞은 들어가려는 팀장들로 혼잡했으므로 그들은 조금 물러나 섰다. 그때 강석규가 낮게 말했다.
"팀 내부에 소문을 퍼뜨렸으니까 이미 다 알고 있을 거요."
그리고는 강석규가 희미하게 웃었다.
"각자 개성대로 움직이겠지요. 33팀과 직접 타협을 하려는 놈도 있을 것이고."
"당신은 어느 쪽이요?"
김명천이 묻자 강석규는 반걸음쯤 물러나더니 사무실로 들어가 보라는 듯이 턱짓을 하며 말했다.
"분란을 일으키고 가만있는 쪽이요, 놀란 짐승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다가 다치거나 야수의 먹이가 되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지."
그리고는 강석규가 이만 드러내고 웃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이런 장난이 말이요."
"나한테 이런 이야기를 해주는 이유는?"
"그것도 전략이지."
강석규가 김명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가만 있는다고는 하더라도 누가 나를 타깃으로 삼았는지 모르니까 최소한 팀장은 우군으로 확보해 놓아야 될 것 아니요? 정보를 주는 대가로 말이요."
"위험한 발상인데."
"회사 측에서 조장한 면도 있습니다. 아마 회사 측에서는 지금의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김명천은 대답하지 않고 몸을 돌렸다. 사무실에 들어가 32팀의 등반 지시서를 받고 나왔을 때 강석규는 보이지 않았고 대신 서나미가 기다리고 서 있었다.
"어디예요?"
초조한 듯 서나미가 물었으므로 김명천은 지시서를 펴 보았다. 밤 9시 정각에 회사를 출발한다는 내용으로 아직 목적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9시 정각에 운동장에서 출발한 버스에는 심사위원 한 명이 동승했다. 버스가 회사 정문을 빠져나갔을 때 심사위원이 마이크를 쥐고 서서 32팀원을 둘러보았다.
"우리는 곧 해발 600m의 수곡산 기슭에 도착합니다. 그곳에서 팀은 좌표대로 5개의 체크 포인트를 거쳐 목적지에 도착해야 됩니다."
버스에는 32팀뿐이었고 정색한 심사위원이 말을 이었다.
"팀원 전원이 목적지에 도착한 시간을 기준으로 평가가 된다는 것을 유의하시도록. 이상입니다."
수곡산은 들어본 적도 없지만 해발 600m라고 했으니 김명천은 조금 만만하게 생각되었다. 등산을 즐기지는 않았으나 다리 힘에는 자신이 있는 것이다. 심사위원이 팀장을 불렀으므로 김명천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좌표와 후레쉬를 건네준 심사위원이 웃음 띤 얼굴로 말했다.
"잘해 보세요."
"감사합니다. 선배님."
공손하게 인사한 김명천이 자리로 돌아와 좌표를 펴들었을 때 주위로 너댓 명의 머리가 둘러쌌다.
"야, 이건 산악행군이군."
먼저 좌표를 읽은 누군가가 신음처럼 말했다.
"산 높이가 문제가 아냐. 산길을 강행군 하는 거야."
맞는 말이었다. 군에서 독도법을 배운 김명천은 지도에 그려진 붉은색 코스를 보았다. 모두 험한 산길을 타고 오르내리게 되어 있었으며 길이는 어림잡아 15km도 넘었다. 그리고 5곳의 체크포인트 위치는 요령을 피우지 못하도록 완벽하게 자리 잡았다. 좌표를 손에 쥔 김명천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는 어수선하게 서 있거나 잡담 중인 팀원을 제 자리에 앉혀 주목시켰다.
"등산에 자신 있는 사람은 손을 들어요."
정색한 김명천이 말했다.
"팀원 전원의 도착을 기준으로 한다는 것은 팀웍 체크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베테랑이 앞뒤에서 끌고 밀어야 합니다."
그러자 곧 4명이 손을 들었으므로 김명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서너 명으로는 부족합니다. 남한테 폐 안 끼치고 코스를 주파하겠다는 사람은 손을 들어보세요."
그러고는 버스 안을 둘러본 김명천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자신을 제외한 19명 중 손을 들지 않은 사람이 6명이나 되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서나미까지 포함해서 3명이 모두 포함되었다.
"좋습니다. 그럼 지금부터 행군 순서를 정합니다. 좌표를 가진 내가 선두에 서지요."
김명천이 20명의 행군 순서를 정하는 동안 버스 안의 분위기는 진지했다. 모두 김명천의 지시를 고분고분 따랐으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순서를 정하고 났을 때 김명천이 머리를 들고 강석규를 보았다. 강석규는 등산에 자신이 있다고 손을 들었던 4명 중의 하나였다.
"만일에 내가 사고를 당했을 경우에 13번이 리더가 됩니다. 이건 팀장의 권한으로 미리 말씀드리는 겁니다."
김명천의 시선이 서나미에게 옮겨졌다.
"부팀장이 있지만, 산악행군에서는 능숙한 리더가 필요합니다. 이의 없지요?"
"없습니다."
서너 명이 소리쳐 대답 으므로 김명천이 다시 강석규를 보았다. 강석규는 대열의 맨 끝에 배치되어 있었다.
"13번, 잘 부탁합니다."
"잘해 보십시다."
강석규가 기운차게 말했을 때 버스는 국도에서 벗어나 일 차선 샛길로 들어섰다. 포장도 되어 있지 않은 산길이다. 산악행군 코스는 수곡산을 중심으로 험한 산과 골짜기를 돌아오도록 만들어져 있었는데 5㎞ 지점의 첫 체크 포인트에서부터 낙오자가 발생했다. 여자 팀원 중의 하나인 9번이었다.
"벌써부터 낙오하면 어떡해?"
하고 남자 팀원 하나가 어둠 속에서 소리쳤지만 그런다고 주저앉은 여자가 일어설 리는 없다.
"업읍시다."
김명천이 후레쉬로 둘러선 팀원들을 비추며 말했다.
"교대로 업고 갑시다."
"그러다 다 낙오하게 될 거요. 앞으로 10㎞나 남았단 말이요."
하면서 나선 사내는 금테 안경의 박종일이다. 박종일은 김명천이 비친 후래쉬 빛을 얼굴 정면에 받으면서 말했다.
"한두 명 때문에 한팀 20명 전체를 탈락시킨다면 난 일성전자의 사원 선발방식을 거부하고 스스로 사퇴할 겁니다. 낙오된 팀원은 그대로 두고 코스를 주파합시다."
"옳소. 맞는 말이요."
누군가가 어둠 속에서 소리쳐 동의했다.
"심사위에서 팀원 전원이 도착한 시간을 기준으로 평가한다고 했지만 낙오자가 생기면 전체를 탈락시킨다고 말하지는 않았어요. 두고 갑시다."
"이런 젠장."
눈을 부릅뜬 김명천이 목소리를 높였다.
"글세, 누가 뭐래나? 누가 도착점에서 돈 싸 들고 기다린답니까? 누가 총 들고 낙오자를 쏴 죽인다는 거요? 낙오자 빼놓고 도착해서 다 잘될지 어떻게 알어? 심사위에서 무슨 꿍꿍이로 지랄을 떠는지 누가 안단 말이야?"
김명천의 목소리가 산을 울렸다.
"업고 천천히 갑시다. 세상 이야기나 하면서 산을 타자구. 바쁠 것 없어."
"그렇지."
강석규가 소리높여 동의했다.
"슬슬 가자구. 각박하게 굴지 말고 말이야. 자, 나한테 업히셔."
그때 주저앉아있던 9번이 쨍쨍한 목소리로 말했다.
"걷겠어요. 고맙지만."
"얼시구."
짧게 웃은 강석규가 김명천을 보았다.
"자, 갑시다. 우린 팀장 의견에 공감하고 있어요."
그래서 늦게 출발한 다른 팀이 4개나 추월하고 지났으며 시간이 7시간이나 지나고 나서야 팀은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때는 여자 팀원을 포함한 5명이 부축을 받고 땅에 겨우 발을 딛는 상태였다.
"만세!"
강석규가 두 손을 들어 올리면서 다소 과장된 동작으로 만세를 불렀을 때 팀원들은 박수를 치면서 자축했다.
"수고들 했습니다."
기다리고 있던 심사위원이 격려했지만 이제는 아무도 결과에 대해서 궁금한 눈치를 보이지 않았다.
"미안했어요."
3㎞ 정도를 남겨놓고 지쳐 쓰러졌던 서나미가 김명천에게 사례했다. 서나미는 나머지 거리를 김명천에게 업혀서 온 것이다. 그러나 32팀은 제한 시간보다 3시간이나 늦었다. 코스를 지나면서 다른 팀의 낙오자를 여러 명 만난 터라 김명천의 가슴은 개운하지 않았다. 그렇게 해서 산악행군을 마쳤고 다음 날 오후에 소집이 끝나 팀원들은 해산했다. 회사 앞에서 버스를 기다리던 김명천에게 지나치던 강석규가 눈인사를 하더니 던지듯 말했다.
"발표는 다음 월요일입니다. 김형."
강석규는 어느새 또 정보를 얻은 것이다.

월요일 오전 10시 정각에 김명천은 전화를 받았다. 핸드폰의 벨이 울린 순간부터 예상하고 있었던 김명천이 대답을 했을 때 이번에도 다른 목소리의 사내가 차분하게 물었다.
"김명천씨 맞습니까?"
"예, 맞습니다."
"수험번호 8247번, 32팀 1번, 맞습니까?"
"예, 그렇습니다."
"귀하는 일성전자의 정식 사원이 되셨습니다.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가슴이 벅찬 김명천은 눈을 부릅뜨고 합숙소의 색바랜 벽지를 노려보았다. 졸업한 지 만 2년 만에 대기업에 취업한 것이다. 그동안 10여 곳의 임시 직업을 거쳤으나 그것은 당장의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서였고 이제야말로 미래를 설계할 수 있는 직장을 얻게 되었다. 특별한 재주를 부린 것도 아니었고 성적이 뛰어나지도 않았다. 운이 좋았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정도로 보통 수준의 김명천이다. 굳이 다른 점을 찾는다면 생존력이 강하다는 점이나 될 것이다.
그러나 일성전자에 입사함으로써 김명천의 주변은 달라졌다. 우선 합숙소 생활을 청산하고 일성전자의 독신 사원 숙소에서 기숙하게 되었으며 안정된 직장 환경을 바탕으로 사생활도 안정되었다. 더욱이 일성전자는 한국은 물론이고 세계의 초일류 기업인 것이다.
3개월간의 신입사원 연수를 마친 김명천이 부서 발령을 받은 곳은 러시아의 하바로프스크 지사였다. 영업부 지망을 했지만 연수만 마친 신입사원을 해외 지사로 발령을 낸 것이다. 총무부에서 발령장을 수령하고 나왔을 때 김명천의 옆으로 강석규가 다가와 섰다. 3팀에서 최종 합격자는 4명이었는데 김명천과 강석규, 그리고 서나미와 박종일이었다.
"김형, 언제 출발이야?"
"일주일 후인데."
쓴웃음을 지은 김명천이 손목시계를 보는 시늉을 했다.
"내일 해외영업부에 가서 신고를 하고 그다음 날은 다시 총무부에서 서류하고 경비를 받은 후에 3일간 휴가야. 그리고는 휴가 마치고 떠나는 거지."
"신나겠구만."
본사 영업 2부에 배치된 강석규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이쪽을 위로하는 표정이 역력했다. 본사 영업부가 해외영업부보다 더 엘리트 코스인 것이다. 해외 근무는 순환제로 되어 있었지만 각 지역 전문가가 필요한 상황이어서 한번 배치되면 10년 가깝게 말뚝을 박고 근무하는 사원도 있다. 조직사회는 어디나 마찬가지로 권부의 핵심 근처에서 근무하는 것이 출세에 이로운 것이다.
"하바로프스크에 미인들이 많다는 거야."
복도를 걸어 나오면서 강석규가 소근대듯 말하고는 김명천의 시선을 받자 빙긋 웃었다.
"괜찮은 여자 있으면 서울로 보내. 내가 다 부담할 테니까."
"알았어."
"참, 서나미가 한번 모이자는데. 김형 떠나기 전에 말이야."
강석규가 아차 하는 표정으로 말했다.
"내일 저녁으로 할까?"
"내일이면 괜찮아."
"박종일이 그 자식은 밥맛이 없지만 할 수 없이 불러야겠구만."
이맛살을 찌푸린 강석규가 힐끗 김명천을 보았다. 박종일은 전자의 연구팀에 배치되었고 서나미는 기획조정실로 발령을 받은 것이다. 강석규가 김명천의 어깨를 가볍게 치더니 떨어졌다.
"자, 그럼 내일 저녁에 보자구. 팀장."
강석규는 아직도 김명천을 팀장으로 부른다.

석 달 만에 김명천의 목소리를 들었는데도 임재희의 반응은 담담했다.
"왠일이야?"
임재희의 핸드폰은 발신자 번호가 뜨는 것을 알고 있는 터라 김명천은 전화를 받아준 것만으로도 반가왔다.
"왠일이긴, 그냥 생각이 나서."
했다가 김명천은 곧 덧붙였다.
"나, 일성전자에 합격했어. 그래서 석 달 동안 신입사원 연수를 받은 거야."
"그랬어? 잘되었네."
약간 목소리를 높였지만 임재희의 분위기는 여전히 가라앉아 있었다.
"그런데 며칠 후면 러시아로 떠난다. 해외 지사 발령이 나서 말이야."
"러시아로?"
"응, 너, 오늘 바뻐? 내가 내일부터는 시간이 없어서."
그랬다가 만일 임재희가 내일 시간이 있다면 팀원들과의 약속을 취소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때 임재희가 대답했다.
"다음에 만나. 지금은 싫어."
"돈 많이 벌고 나서 말이냐?"
"전화 끊어. 안녕."
"시발년."
그때 전화가 끊겼으므로 김명천이 다시 잇사이로 같은 욕설을 뱉았다. 임재희가 지금도 룸사롱 하진에 나가는지 어쩌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것이 둘의 관계에 장애가 된다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던 김명천이다. 그러나 임재희는 그것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지금까지 몇번 만나지 않았지만 어려웠을 때 위로가 되었고 도움도 받았던 임재희와의 관계를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김명천이다.

다음 날 저녁에 김명천이 약속장소인 시청 앞의 커피숍에 나갔을 때 서나미와 강석규가 먼저와 기다리고 있었다. 둘 다 밝은 표정이었는데 특히 서나미의 표정은 더 환했다.
"이제 러시아로 떠나면 오랫동안 만나지 못하겠네."
"하바로프스크로 휴가 오면 돼. 내가 가이드해 줄 테니까."
"흥. 꼬시려면 제대로 해. 하바로프스크는 볼 것 없어."
눈을 가늘게 뜬 강석규가 머리를 저었다.
"그리고 지사에서 신입 뺑뺑이 도느라고 가이드는커녕 오줌싸고 지퍼 올릴 시간도 없어."
"왜 열을 받고 야단이야?"
서나미가 강석규에게 눈을 흘겼다.
"난 시베리아 횡단 열차를 타고 싶었단 말이야."
"그럼 김명천씨는 공항에서 기차역까지만 가이드하면 되겠다."
그때 박종일이 들어섰으므로 화제가 그쪽으로 옮겨졌다.
"연구팀은 군기가 세다던데 그렇게 느려 터져서 배겨나겠어?"
강석규가 한마디 했고 서나미도 거들었다.
"벌써 한 방 맞은 얼굴이네 머. 어디를 걷어 채였나 봐."
"빌어먹을, 배가 아파서 그래."
이맛살을 찌푸린 박종일이 손으로 배를 쓰는 시늉을 했다.
"요즘 연장 술이야. 어젯밤에도 3차까지 갔어."
"젠장. 오늘은 4차다."
김명천이 박종일을 흘겨보며 말했다.
"난 누가 술 마시자고 할 놈도 없었다. 애인도 떨어져 나갔고 친구라고 불러낼 놈도 없었단 말이야."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라 목소리가 높아졌다.

갈비집에서 식사와 함께 소주를 마시고 그 여세를 몰아 가라오케로 옮겨 미팅을 끝냈을 때는 밤 11시 반이었다. 입사 면접 때 같은 팀이었다가 연수도 같이 받았지만 이제 각기 부서가 달라 뿔뿔이 흩어져야 한다. 5만 명이 넘는 일성전자의 사원 틈에 섞이면 언제 다시 만날지 기약도 할 수 없는 것이다.
"자, 그럼 행운들을 빈다."
가라오케 앞에서 김명천이 정색하고 세 명의 동기를 둘러보았다. 이중 끝까지 갈자는 누구인지 또 중도에서 탈락할 사람이 있는지도 알 수가 없는 것이 인생이다.
"러시아에서 잘 지내."
이제는 강석규도 차분한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서로 돕고 지내자구."
"연구실로 가끔 연락해."
박종일이 웃음 띤 얼굴로 김명천의 손을 잡았다.
"우리 입사 면접 때의 그 기백을 잊지 말자구."
"우린 같은 방향이야."
서나미가 김명천에게 말했다.
"인사는 나중에 하자구."
"그렇군."
머리를 끄덕인 김명천이 강석규와 박종일을 보았다.
"그럼 우린 간다."
그들과 헤어져 택시 정류장으로 다가갈 때 서나미가 김명천에게 말했다.
"포장마차에서 한잔 더 할까?"
"좋지."
독신자 숙소는 어제 정리해서 오늘 밤 여관에서 자고 내일 고향 어머니한테 내려갈 작정이었던 김명천이다. 어머니와 사흘간의 휴가가 끝나면 하바로프스크로 날아가야 한다. 서나미가 웃음 띤 얼굴로 김명천을 보았다.
"강석규가 나한테 살짝 3차 가자고 했단 말이야. 그런 줄이나 알고 있어."
"주가 올리려는 수작인 줄 알고 있겠다."
김명천이 정색하고 대답하자 서나미는 팔짱을 끼었다.
"떠난다니까 서운해. 같이 있으면 자주 만날 수 있을 텐데."
그들은 근처 골목 안쪽에 있는 포장마차 안으로 들어가 나란히 앉았다. 포장마차 손님은 그들까지 네 명 뿐이어서 한산했다. 술과 안주를 시킨 김명천이 서나미의 옆얼굴을 보았다. 화장기가 거의 없었지만 윤기가 흘렀고 곧은 콧날 밑의 입술 윤곽이 선명했다. 김명천의 시선을 느낀 서나미가 머리를 들더니 빙긋 웃었다.
"뭘 봐?"
"널 기억해 두려고."
"어이그 닭살."
어깨를 치켜올려 보였던 서나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애인이 정말 떨어져 나간 거야?"
"그래."
"팀장 수단이 좋은 줄 알았는데 과대 포장된 모양이군."
서나미하고는 신입사원 연수 때도 같은 조에 있었기 때문에 서로의 성품은 거의 익혔다. 강석규와 박종일도 물론 같은 조여서 친숙해졌지만 김명천은 서나미로부터 전해지는 분위기가 따뜻하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남녀의 감정은 느낌만으로 충분한 것이다. 느낌을 받지 못하는 상대라면 없는 것이나 같다.
"자, 한잔해."
서나미가 앞에 놓인 소주병을 들면서 생기있게 말했다. 소주에다 양주를 마셨고 폭탄주까지 돌렸지만 서나미의 표정은 말짱했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만나고 또 헤어지고 그러는 거야."
서나미가 한 모금 소주를 삼키고는 김명천을 보았다.
"아직 여사원이 임원으로 승진된 케이스는 없어. 하지만 난 임원이 될 거야."
"될 수 있겠지."
정색한 김명천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때까지 일성전자가 경쟁을 뚫고 성장해 간다면 말이야."
"두고 봐."
서나미가 다부지게 말하더니 김명천의 잔에 술을 채웠다. 신입사원 연수 때도 서나미는 토론이나 시험, 또는 현장실습에서도 최상위권에 들었다. 2차 면접 때 산악행군에서 낙오한 것을 빼고는 그 어느 것에도 남자들에게 지지 않았던 것이다.
"내 목표는 일성전자의 CEO야. 기간은 앞으로 25년 후."
"그럼 네가 49살 때인가?"
"어쨌든 40대에 CEO가 될 테니까."
"그렇게 되면 날 좀 봐주라."
"그때 김명천씨가 빌빌거리고 있다면 아마 퇴사해야 할걸?"
"더럽군. 내가 미리 그만둬야지."
"오늘 밤 나, 집에 들어가지 않아도 돼."
불쑥 그렇게 말한 서나미가 김명천의 시선을 받더니 빙긋 웃었다.
"어차피 나도 내일부터 이틀간 휴가니까 난 동해안이나 가겠어."
"이거 영광인데."
"2차 면접 때 낙오했던 날 업어준 보상쯤으로 치부하면 돼."
"내가 뭐라고 하지 않아도 되겠지?"
"뭘?"
"좋아한다던가 미래를 함께 설계하자는 따위."
"또 닭살."
이맛살을 찌푸린 서나미가 술잔을 내려놓더니 손목시계를 보았다.
"호텔에 가자."
서나미가 정색하고 말했다.
"분위기 있는 곳으로."
그때 김명천의 머릿속에 얼핏 임재희의 모습이 떠올랐다가 지워졌다. 그때 임재희와 호텔 앞까지 갔다가 돌아왔지만 지금은 다르다. 반년도 되지 않은 기간이었으나 신분이 달라졌고 여유가 있게 된 것이다. 포장마차를 나온 그들이 택시를 탔을 때 서나미가 운전사에게 말했다.
"성북동 칼튼 호텔요."
순간 김명천의 가슴이 철렁했다. 임재희가 데려간 호텔이었던 것이다. 택시가 속력을 내었을 때 좌석에 등을 붙인 서나미가 머리를 돌려 김명천을 보았다.
"김명천씨가 다른 남자들과 다른 점이 하나 있었어."
"뭔데?"
"날 의식하지 않은 것. 예를 들면."
서나미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내 앞에서 가식적인 행동을 하지 않은 것 같았어. 때로는 그것이 날 여자로 보지 않는 것 같아서 허전하기도 했지."
"음. 효과가 있었군."
얼굴을 굳힌 김명천이 머리를 끄덕였다.
"고등학교 때 수학 선생님이 가르쳐준 방법이었는데."
"달관한 사람 같기도 했고."
김명천의 반응에 상관없이 서나미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믿음이 간 거야."
그것은 세파를 많이 겪었기 때문일 것이었다. 밑바닥 생활부터 해온 사람들은 기회가 왔을 때 가볍게 다루지 않는 법이다. 고맙게 여기며 정중하게 받는다. 그것이 서나미에게는 다른 사람과 다르게 보였을 수도 있다. 김명천이 낮게 말했다.
"네가 꾸밈없이 자란 성품인 것 같다."
"난 어둡고 끈질기고 계산에 밝은 성격이야. 네가 몰라서 그래."
다른 사람에게는 처음 털어놓은 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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